한 곳에서 태어나 평생을 거기에서 살아온 사람에게 그곳을 떠나라고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이 영화의 시작은 여기이다. 그리고 그는 결국 배에서 내리지 못한다. 바깥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이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포기할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배 밖으로 가까이 보이는 항구에 대한 두려움은 어쩌면 이길 수 있을 것처럼 보였지만, 그 너머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은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나를 발견하는 과정
주인공 나인틴헌드레드는 배와 육지를 연결하는 계단의 중간에 멈춰 멀리 육지 쪽을 바라본다. 그리고 생각에 잠긴 후 다시 배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는 결국 새로운 세상으로 진입하지 못했다. 자신에게 익숙한 것을 버리지 못했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틀을 깨지 못했다. 그에게 나타난 사랑은, 처음 느껴본 대단한 것임에도 그가 가진 이 두려움을 이기게 할 만큼 강력한 것이 되지 못했다. 그녀는 그에게 대단한 기회였는데, 그것을 잡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런데 무엇이 그렇게 그가 두렵게 느끼도록 했을까.
대개 나를 발견하는 과정의 처음은 주변의 반응이다. 누군가 이것을 잘한다고 칭찬하면 그것을 열심히 하고, 그러다 보면 그것을 잘하게 된다. 그러다 그게 적성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관련된 일을 찾는다. 그렇게 평생 그 일을 하며 살아간다. 사실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살아가면서 수많은 주변의 평가에 기분의 좋았다가 나빴다가 영향을 받긴 한다. 그러다 문득 이게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하고 생각한다. 이렇게까지 남들에 휘둘릴 일인가 하고.
솔직히 남들의 평가에서 벗어나기 힘든 이유는, 그것을 제외하고 나면 나에게 남는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사실 잘 모른다. 무엇이 옳다고 생각하는지 사실 잘 모른다. 많은 경우 나 혼자 어떤 결정을 내려본 적이 없다. 늘 주변에 조언을 해주거나 반응을 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혹은 따라 할 남들의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이런 도움 없이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하는 건 두렵고 외롭다.
외로움을 견딘다면
하지만 외로움을 견딘 자들만 가질 수 있는 어떤 달콤함이 있지 않을까. 어떤 것을 온전히 혼자 결정할 때 느낄 수 있는 당당함. 남들의 의견과 상관없이 나만의 취향이 있고, 어떤 것에 대한 나만의 관점이 있을 때 느껴지는 자유로움. 외로움을 이기고 나서 온전히 독립적인 나로서 꾸릴 수 있는 내 세계에 대한 뿌듯함 같은 것들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일까. 혼자 있다는 외로움은 어떻게 보면, 혼자면 된다는 자기 완성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사실 이런 자기 완성이 나인틴헌드레드에게서 보였다. 그가 스스로 작곡한 음악에 대해 취하는 태도가 그랬다. 그의 음악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온전한 생각, 느낌이 담겨 있는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의 음악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어떤 거리낌도 없어 보였으며, 그 음악에 대한 주변의 평가에 대해서도 휘둘리지 않았다. 그런 것들이 그에게 하나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단지 자신이 좋다고 느끼고, 중요하다고 평가하는 것만 있으면 됐기 때문이다. 그는 주변의 의견을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새로운 한 걸음의 무게
그렇게 자유롭고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 배 밖의 세상에는 왜 그렇게 큰 두려움을 느꼈을까. 처음에는 배 안의 세상이 전부인 그에게 배 밖으로 한 걸음이 당연히 죽음만큼 두려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새로움에 대한 두려움이 '강할' 사람이었다면, 그런 연주와 작곡능력이 어울리지 않는다. 새로운 곡을 자유롭게 만들어내고 자신의 음악과 스스로에게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의 음악을 듣는 새로운 타인의 반응과 평가에는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그저 배 밖이라고 해서, 새로운 세상에 그렇게 두려움을 갖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가 이미 겪고 있는 세상이 바깥쪽 세상의 모방이고, 그가 겪은 사람 모두가 배 밖에서 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새로움에 대한 탐구에 두려움이 없는 성격은 꽤나 강한 일관성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일종의 태도나 습관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 안에서 어떤 새로움에는 두려움이 전적으로 없는데, 어떤 새로움에는 통제할 수 없는 만큼 두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상반된 기질이 서로 충돌한다. 그래서 자신의 음악에 대한 나인틴헌드레드의 당당한 태도와 배에서 육지로 연결되는 계단 위에서 망설였던 그의 태도가 나에게는 서로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한 걸음이 죽음만큼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감독의 의도에는 동감하지만, 그러기에 나인틴헌드레드가 원래 가지고 있던 자유로움과 당당함이 너무 아름다웠다. 그래서 미안하지만 그의 망설임은 조금 부정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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