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져 버린 시간의 흔적
나의 얼굴이 바뀌더라도 여전히 나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전쟁의 상처가 얼굴에 고스란히 남았다. 그 상처를 가리기 위해 새로운 얼굴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만 주인공 넬리는 여전히 예전의 얼굴이 그리웠다. 모든 것이 망가진 지금, 그 얼굴이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을, 세상을 연결하는 유일한 매개체였다. 그것을 잃는다는 것은 나를 증명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된다.
얼굴이 그렇게 나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넬리는 그렇다고 할 것이다. 단순히 형태를 넘어서 내가 짓는 표정, 눈의 깜빡거림, 흉터, 주름이 그동안 내가 살아낸 시간들을 담고 있다. 그것이 아름답냐 아니냐를 떠나서 그 모든 흔적들이 내가 가진 이야기들이다. 그 이야기 속에는 슬프거나 잊고 싶은 이야기도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이야기가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그녀는 한 사람을 생각하며 버텨왔다. 그리고 그동안 그녀가 가졌던 의지 역시, 그녀의 얼굴 어딘가에 남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녀의 의지와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잊고 싶지 않아서였다.
뒤엉켜 버린 시간들
그리고 이 과정을 함께 한 친구가 있었다. 넬리가 새로운 얼굴을 가질 수 있도록 했고, 새로운 시작을 갖기를 바랐다. 어쩌면 이 친구는 넬리를 도우면서, 망가진 자신의 주변이 그녀의 얼굴처럼, 삶처럼 재건되기를 바랐나 보다. 그렇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자신도, 자신의 민족도, 자신이 믿는 다른 무언가도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느끼길 바랐나 보다. 현실은 너무도 처절했고, 희망의 가능성이 없어 보였기 때문에 무엇이라도 잡고 희망을 갖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넬리가 그녀의 뜻을 따르지 않았을 때, 새로운 시작을 거부했을 때, 과거의 자신에게 돌아가려 했을 때 그렇게 절망했을 것이다. 삶을 계속 이어가지 못할 만큼 말이다. 그것은 전쟁으로 망가진 자신과 주변의 삶을, 잊고 싶은 과거로 회귀시키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넬리가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던 그녀의 남편이 바로 '과거'의 세상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남편은 이미 '현재'를 살고 있었다. 넬리는 전쟁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었고, 남편은 전쟁 이후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싶었다. 다른 시간 속에 살고 있는 둘의 모습에서, 전쟁이 가져온 파괴와 시간의 불일치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혼란이 느껴진다. 생존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붙잡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것이 과거이고 어떤 것이 현재인지 구분이 됐을까.
그렇기 때문에 남편은 넬리를 알아보지 못했나 보다. 처음에는 넬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얼굴은 바뀌었지만, 체구는 남아있고, 자세가 남아있고, 목소리가 남아있고, 말투가 남아 있을 테니 말이다. 오직 얼굴만이 그녀를 알게 하는 전부였을까. 어쩌면 그는 그녀를 잊고 싶었을 수도 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그녀를 배반한 스스로가 부끄러워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녀를 생각하는 것에서 자신의 생존에 대한 이기심 보여, 생각하는 것을 지속할 수 없을 만큼 괴로웠을 수도 있다.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하지만 전쟁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자신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저버리는 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그것이 내 경우라면 나는 다르게 행동한다 자신할 수 있을까. 때로는 인간의 어떤 본성은 추악하다. 인간은 생명체이기 때문에 자기 생명만을 위한 결정도 내리지만, 반면에 지적이기 때문에 나중에 그것을 후회하거나 비난한다. 요즘에는 운이 좋게도 이렇게 두 개의 극단이 만날 경우는 흔치 않다. 하지만 그때의 전쟁은 이 두 개의 극단이 쉽게 일어나도록 하는 시기였다. 그런데 다들 그렇게 힘들었음에도, 어려운 결정의 순간을 겪었음에도, 전쟁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옳고 그름을 꼭 따져야 하는 동물이다. 이것 역시 ‘그다음 생존’을 위한 것이므로.
넬리의 노래를 들었을 때야 비로소 남편은 그동안의 의심들이 단순히 의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토록 그녀를 잊고 싶었기 때문에 이제야 그는 그녀를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녀는 과거인데, 돌아올 수 없는 과거인데, 이렇게 그 앞에 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어떤 부분에서 그를 비난해야 할까.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점. 아니면 그녀가 죽고 없다고 생각했을 때 그의 삶을 꾸려 나가려고 방법을 찾았던 점. 아니면 자신의 생존을 위해 그녀를 밀고했던 점. 사실 어느 것 하나도 타인이 그를 비난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자기 자신은 어떨까. 이 모든 질문들과 마주했을 때,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는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희망한다. 어차피 그는 남은 평생을 그 질문들과 마주할 테지만, 다시 그녀와는 마주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도 어쩔 수 없었을 텐데, 누구라도 어쩔 수 없었을 텐데, 그녀를 다시 보게 되면 그는 더 이상 삶을 살아갈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 인간이 추악해지지 않는 것은, 자신의 의지나 고고함 때문이 아니라 상황이 좋고 만만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그것은, 단지 우리가 어떤 시간을 살고 있느냐에 관한 문제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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