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팬텀 스레드
개봉: 2018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
어떤 세계
어떤 세계가 있다. 모든 게 질서 정연하다. 작은 것 하나에도 정해진 입장이 있고, 취향이 있다. 대부분의 것들은 이미 검증되었고, 그 때문에 새로움에 대한 여지는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정교하게 짜여 있는 질서는 어떤 문제든 나름의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고, 안전하다. 여기서 이 질서를 만든 이는 스스로 강함을 느끼고 있으며, 이런 자각은 이 질서를,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갑옷을 더욱더 빈틈없이 짜여 있게 만든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질서의, 조직의 공극이 점점 더 메워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채워지는 공극과 그로 인해 더욱 단단해진 질서는 만족스럽지가 않을 때가 있다. 이전의 단단함이 정체로 느껴질 때면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나의 질서가 강해질수록 그 질서 안에서 포근할 줄 알았는데, 늘 뭔가 허전함을 느낀다. 늘 나를 채워줄 무언가를 기다린다. 그리고 이 질서가 틀린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을 들켜서는 안 된다. 약점을 보여서는 안 된다. 약점을 보이면 나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 무너질 것 같다. 이 세계에서는 그렇게 질서에 의존한다. 나는 이 질서가 있기 때문에 스스로 강하다고 큰 소리로 외치고 있지만 그 질서 안에는 가장 연약한 모습이 있다.
사실 이렇게 강한 질서 속에 살고 있는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여기에 만족하지 못할 것임을. 하지만 이 외의 다른 방법을 못 찾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본 적은 없기 때문에 지금의 질서에 집착하게 된다. 처음에 이것은 무엇보다 기발한 것이었고, 열정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인정받을 만한 가치도 있는 것이었다. 이것을 따르면 편리하고, 그 편리는 나에게 편안함을 준다. 그러나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내가 가진 질서가 전부가 아님이 보이고, 그 질서 밖에 다른 질서들이 보이고, 그것들이 내 것보다 우월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다 나는 영원히 뒤처질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불안감이 들 때면 나는 다시 또 숨을 수밖에 없다. 지금 내가 가진 것으로도 준수한 수준까지는 달성할 수 있으므로 굳이 이 질서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고 애써 위안한다.
다시 반복되는 새로움에 대한 갈증을 느낄 때, 내 기존 질서를 유지한 범위에서 수용할 수 있는 미미한 새로움 정도로 그 범위를 제한한다. 어차피 갈증을 약간 해결할 수 있을 정도면 됐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애초에 변화가 아니고, 사실 이미 가진 것을 지키는 방식이다. 이렇게라도 하는 것이 스스로 정체되어 있지 않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꽤 위안이 된다. 하지만 알고 있다. 이 위안은 스스로에 대한 눈속임이고, 결국 갈증은 해결되지 않을 것임을.
다른 세계
다른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흐른다. 기존에 정해진 규칙은 없고, 상황의 변화에 따라 유연하게 흐른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많이 축적된 것은 없다. 한 가지 방향으로 힘이 집중되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과 귀는 늘 열려있고, 주변을 관찰한다. 어떤 역할도 할 수 있고, 쉽게 배울 수 있다. 호기심이 많고 질문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정해졌다고 얘기되는 것들에 늘 왜라고 물어본다.
이 질문들은 어떤 이에게는 달갑지가 않다. 이미 많은 경험을 쌓았다고 생각하거나, 어떤 부분에 대해서 심사숙고를 마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 대한 그들만의 답을 가지고 있다. 그들에게 그들이 만들어놓은 답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은, 그들이 그동안 만들어 온 삶과 그들이 가졌던 고심을 부정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래서 어떤 질문은 어떤 사람들에게 매우 공격적으로 들린다. 질문한 사람이 어떤 의도와 배경을 가졌든 말이다. 자기만의 질서가 강한 사람들에게는 그 질서에 대한 질문에 대답할 시간이 없다. 모든 것은 계획된 대로 흘러가야 한다.
하지만 질문하는 사람들은 궁금해한다. 그 질서가 왜 그렇게 견고해야 하는 지를. 어떻게 이렇게 많은 상황과 사람들 속에서 그렇게 단단한 질서를 세울 수 있는 지를. 만약 그것이 질서를 세운 자신에게만 적용되는 질서라 할지라도, 그렇다면 자신에게는 왜 그렇게 가혹하게 구는 지를. 사실 어떤 것이든 ‘원래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건 없는데, 어떻게 어떤 질문이 들어왔을 때, 마치 그 질문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그렇게 답할 수 있는 지를. 하지만 질문하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의 모든 경우가 다르게 보인다. 작은 차이들이 모두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
두 세계의 뒤엉킴 그리고 죽음
다행히 차이와 변화에 예민한 질문들은 질서를 구축하는 사람들에게 결과적으로 도움이 된다. 하지만 질서에 의존하는 사람에게 이 도움은 매우 고통스럽다. 그것은 일종의 껍질, 갑옷을 깨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내가 이미 세워놓은 단단한 질서를 깨고, 그 안의 내가 가진 가장 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내 질서를 잃어버린 나는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을까 불안하다. 질서는 나의 노력이고 흔적이었다. 그것이 정체되는 것에 불만족은 있었지만 그것이 아예 없어지는 불안과 비교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질서를 만든 스스로가 그 질서에 질문하는 사람을 찾을 때이다. 내가 이룩해 놓은 그동안의 질서를, 그 강함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용기가 날 때이다. 그 강한 껍질에 대한 질문은 그것의 부정으로, 그리고 이것은 나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이것은 마치 죽음처럼 나를 위협한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느껴지는 과거의 강함에 대한 불안감과 ‘손으로 짚을 수는’ 없지만 느껴지는 무의식적인 의심은 이런 죽음의 고통을 무릅쓸 용기를 준다.
하나의 질서에만 갇히는 것은 어리광을 부리는 것과 같다. 이미 잡고 있는 것만 쥔 채, 시야가 좁아 있고 목소리는 높아진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건, 그렇게 잔뜩 들어간 힘을 빼고 주변의 질문에 귀 기울일 수 있는 태도를 갖는 것 같다. 그 질문을 듣는 것이 고통스럽고, 나의 치부를 보여야 해서 죽을 것처럼 위협적이더라도 말이다. 스스로 그런 죽음 같은 경험을 반복하는 용기를 갖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강했던 누군가가 스스로 무너짐을 택했다면, 그리고 그 무너짐이 새로운 강함에 대한 강한 열망에서 시작된 거라면, 결코 그가 영원히 죽어있을 일은 없을 것이다. 반드시 다시 살아날 것이다. 몇 번이고 다시, 새로운 강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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