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에 대한 오해
철학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철학은 우리 삶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와 상관없는 지적 활동이라는 생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철학하면 떠오르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어려운 말들, 그 말들을 정리해 놓은 더 어려운 용어들-예를 들어 변증법적 세계관과 같은-은 우리가 사는 일상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은 생각을 위한 생각정도로 치부되고, 이 가치와 의미, 활용 방법에 대해 고민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작은 것 하나라도 철학 없이 탄생하는 것은 없다. 그 철학이 남에게 빌려온 것이든,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든 모든 행위에서 철학은 행동의 시작점이 된다. 이 말이 도저히 납득이 안 된다면, 여기서 철학을 ‘본질에 대한 고민’ 정도로 바꾸면 의미가 통할 것이다.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이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일이라면, 우리는 이 일은 왜 하는지, 이 일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일과 일을 둘러싼 관계 - 그것이 다른 일이든, 사회든, 사람이든 - 에 대해 고민하고 질문하게 되어있다. 진짜가 무엇일지, 부가적인 것들을 덜어냈을 때 최후에 남는 것은 무엇 일지에 대해 생각을 멈추지 않고 끝까지 파보는 것이 바로 본질에 대한 탐구이며, 사실 이것이 철학의 시작이다.
스스로 주인이 되는 것
본질에 대한 탐구가 진정으로 의미가 있으려면, 그 본질에 대한 고민이 모두 '나'로부터 나온 것이어야 한다. 내가 고민하는 문제로부터 가까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에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직접 경험하고 있는 일상에 대해서 생각할 때, 그 일상의 모든 맥락을 숙지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 일상이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 깊이 있는 생각, 즉 본질에 대한 탐구를 시작할 수 있다.
이 문제는 나의 문제이고, 나의 것이다. 나는 그 속에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는 이 문제의 본질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 필요가 절실할수록 우리는 문제의 본질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이 필요가 곧 질문의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 그 문제를 발생시키는 진짜 이유에 대해 질문하는 것을 말한다. 잠깐 그 문제를 잠재울 수 있는 해결책을 찾고 싶은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 문제가 해결된 상태에 있고 싶기를 원한다면, 이 문제가 작동하는 과정을 파악하고 싶고, 그 과정에서 이해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질문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어떤 문제에 대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질문할 때,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주도적으로 행동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문제들에 대해 주도적인 행동으로 대응할 때, 우리는 스스로 주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나의 확장
결국 주도적인 행동, 주도적인 생각은 ‘내 문제’에 대한 인식으로 시작된다. 어떤 문제가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을 때, 그 문제에 대해 집중력 있는 생각을 유지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대개는 그런 에너지를 들일 필요가 없다. 사실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된 문제에 대해서 만이라도 스스로 주인이 되는 생각의 방식과 습관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나를 지키는 훌륭한 전략이 된다. 본질에 대한 탐구는 문제를 보다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고, 최소한 그것은 나의 이익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질문은 어디까지가 나에 관한 ‘직접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이다. 처음에는 생계나 금전관계 같은, 나에 대한 문제의 영향력이 눈에 보이는 범위까지를 나에게 직접적인 문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내가 겪는 일들은 다른 사람, 다른 일과 연결되어 있고, 어떤 문제는 이 관계를 파악하고 이 관계에서 오는 문제까지 해결하지 않으면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리고 이것들이 많을 경우 이 관계들의 경향과 흐름까지 파악해야 한다. 이쯤 되면 내가 신경 써야 하는 범위가 늘어났다.
내가 신경 쓰는 범위가 늘어났다는 것은 내가 질문하는 영역 또한 늘어났다는 것을 뜻한다. 영역이 늘수록 질문의 관계가 복잡해진다. 그리고 이 복잡한 관계를 하나의 일상적인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어렵다. 어떤 것을 설명하는 구체적인 언어가 다른 것을 설명하는 데는 적용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여기서 언어는 점점 더 일반화된다. 어떤 문제가 어떻게 발생하고, 그 문제가 다른 문제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의 맥락을 모두 이해한 상태에서는, 이 언어가 일반화되어 있어도, 그 언어를 각각의 상황에 적용해서 다시 해석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탄생한 이 언어에만 집착해 그 언어를 탄생하게 한 현상과 그 현상의 맥락을 보지 않을 경우에 이 언어는 현실과 분리된, 말 뿐인 말로 보인다.
결국 철학은, 그리고 철학자들의 어려운 말 역시, 사소하고 일상적인 현실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문제를 마주한 사람'을 우리가 아는 유명한 철학자로, '다양한 문제들이 연결된 상황'을 인류 전체로 치환하면 철학의 탄생과정과 유사하다. 우리는 흔히 철학자들이 남긴 마지막 유명한 말들과 이론을 먼저 보고, 그 말과 이론이 탄생한 배경과 맥락을 보지 않기 때문에 철학자들의 말이 어렵게 느껴진다. 와닿지가 않는다. 하지만 모든 철학자들의 말은 그들 주변의 지극히 일상적인 문제로부터 시작되었다. 다시 말하면, 사실 그들의 고민 대상은 사실 위에서 말한 ‘인류 전체’가 시작이 아니었다. 고민은 철학자 자신과 자신 주변의 관계에서 시작되었고, 그 관계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확장되었으며, 그러면서 이 모든 관계의 문제를 아우르거나 해결할 수 있는, 정리된 언어가 탄생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그들이 탄생시킨 언어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처한 환경이 어땠길래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혹은 그들이 처한 환경에서 어떻게 그들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하는 생각의 꼴이다. 그리고 이 꼴을 보는 이유는 나의 생각 방식, 내 생각의 꼴을 독자적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참조하기 위함이다. 일단 시작은 나를 둘러싼 관계의 개선이나 내 문제의 해결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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