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변하지 않는가
흔히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 말은 부정적인 결론에 인용된다. 사람은 변하기 않기 때문에 변할 거라고 기대해서 잘못된 결정을 내리지 말라는 것이다. 문제가 있는 사람이 이제는 바뀔 거라고 기대하기보다는 그냥 그 사람을 더 이상 믿지 말라고 말하는 경우이다. 괜히 사람이 변할 거라 믿었다가 자신만 다치지는 것을 조심하라는 경고이다. 내가 본 것 중, 이 말을 가장 긍정적으로 사용한 경우는 어느 기업가의 말이었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고정상태에서 그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할 수 있다면, 그중 어느 부분을 부각할 수 있고, 어느 부분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지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정적으로 보든, 긍정적으로 보든, 위 두 가지 경우에서 초점은 대상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데 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부정적으로 사용할 때는, 대상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할 내가 혹여 일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을 때 피해 보는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 긍정적으로 사용할 때는, 타인을 평가할 때도 현재 그의 상태를 고정해 두면 그의 장점과 단점에 대한 나의 대응 전략을 명확하게 세울 수 있다는 해석이 있다. 두 가지 모두, 나의 '안전성'을 보장해 준다는 점에서 사람들에게 쉽게 옳은 말로 받아들여진다.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 이유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는 표현에서 말하는 '변하지 않음'은 어떤 사람의 주요한 생각이나 행동의 패턴일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자주 쓰는 사람은 어떤 사람의 주요한 생각과 행동의 패턴, 그 사람의 성향에 대한 파악에서 비교적 안전한 해석을 내리고 싶어 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 사람이 만든 과거의 행동은 이미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의 근거로써 분명하고,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고민이 되는 순간은 이 사람이 변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일 때이다. 이 의지는 눈에 보이는 것도, 이제까지 검증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 사람이 과거에 만든 행동의 결과와 비교했을 때, 판단의 근거로 쓰기에 설득력이 부족하다. 의지는 미래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안전한 판단에서는 과거와 미래 중, 당연히 과거에 비중을 더 많이 둔다.
어떤 사람에 대한 판단이 나의 이해관계와 얽혀 있다면, 안전한 방법에 비중을 두는 것이 합당하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기업가의 태도는 정당하고 합리적으로 보인다. 이 기업가는 아마도 어떤 사람에 대해 판단을 내리기 전에 그 사람을 유심히 살펴봤을 것이다. 그 사람에 대한 장점과 단점의 발견이 자신의 이익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므로, 편견에 휩싸이는 것을 최소화하려 했을 것이며, 장점과 단점을 정량적으로 파악하려고 했을 것이다. 단순히 '이 사람은 이렇네'하는 순간적이고, 무성의한 결론이 아니라, 전문적이고 면밀한 검토 과정을 거친 분석이었을 것이다. 이 경우, 판단하려는 사람에 대한 평가가 틀렸을 경우, 책임은 판단을 내린 당사자가 진다. 기업가로서, 사람에 대한 잘못된 판단은 이익의 손실로 이어진다.
사람에 대한 쉬운 결론이 가진 위험
문제는 나와의 이해관계에 그리 얽히지 않은 사람에게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무심결에 쓰는 경우이다. 흔히 다른 사람에게 조언할 때, 혹은 사람들 사이 떠도는 가십에서 '거봐 사람 안 변한다니까'라는 말을 쉽게 듣는다. 그리고 대개 이 경우, 이 말을 하는 당사자는 사실 그 말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변하든, 안 변하든 별로 관심이 없다. 본인이 만든 평가가 틀렸을 경우, 본인이 져야 할 책임이 없기 때문이다. 평가에 대한 책임이 없기 때문에, 평가 대상에 대한 면밀한 검토도 관심도 없었던 경우가 대부분이다. 단지 대화에 끼고 싶어서, '어디서 주워들은 얘기'로 누군가를 쉽게 평가하고 결론 내린다. 본인도 어딘가에서 그렇게 쉽게 평가되고 있을 수 있다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쉬운 결론이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다른 사람의 가능성을 짓밟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불어 이것은 내가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닫기 때문이다. 타인의 가능성을 무시하는 말하기 습관은 나에게도 이어지기 쉽다. '역시 내가 그렇지 뭐'하고 말이다. 혹은 변화하려는 타인을 곁에 둘 수 없게 된다. 변하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은 그 의지를 무시하는 사람 곁에 있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작심삼일의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도 변화 의지를 북돋아줘서 작심오일을 만들어주는 사람 곁에 있고 싶지, 작심삼일 했을 때, '내가 뭐랬어. 그럴 줄 알았어.'라고 말하는 사람 곁에는 있고 싶지 않다.
사람은 변한다
누군가에 대해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해도 되는 유일한 사람은 자기 자신 밖에 없다. 우리는 자신이 만든 과거의 행동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현재의 의지만 완전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내 가능성을 제한한다면, 그 책임 역시 내가 지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가' 변할 수 있는지, 없는지만 알 수 있을 뿐, '타인'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평가할 자격이 없다. 그저 지켜볼 뿐이다. 만약 타인의 가능성에 대해, 삶에 대해서 어쩔 수 없이 평가해야 되는 경우에는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그 대상에 대해 면밀히 살펴야 한다. 특히나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처럼 타인의 가능성에 부정적인 결론을 내릴 때는 더욱 그렇다. 그것은 변화하려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무의식적으로 제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비즐러는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다 어떤 타인의 삶을 가만히 지켜보게 되었다. 점점 더 그 삶의 많을 것을 알아갈수록, 그것에 공감할 수 있게 되었고, 동화되었다. 마음이 조금씩 움직였고, 결국 자신이 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지켜보던 타인의 삶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자신의 삶 전체가 흔들리는 위험을 감수하고서 말이다. 그가 타인의 삶에 관여하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 그는 그 개입에 관해서도, 자신의 변화에 대해서도 모든 책임을 지려고 각오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로 인해 결국 그의 삶은 비참하게 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비참함을 감수한 변화로 그는 자신의 가능성을 일깨웠고, 타인의 가능성을 지켜주었다. 그것은 그에게도 선물이었지만, 그가 지켜본 타인의 삶에도 선물이었다. 사람은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변할 수 있다. 그 변화에 진심이 있다면, 오래 걸릴 수는 있지만 선물과도 같은 변화가 언젠가 찾아올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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