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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조 블랙의 사랑] : 존재의 이유

by 리질리언스 2023. 4. 16.

빌의 눈빛

  주인공 빌은 자신을 데리러 온 저승사자 조가 자신의 딸과 사랑에 빠져 그녀를 데리러 가겠다고 말하자 분노한다. 조가 데려간다는 것은 죽음을 뜻한다. 어느 아빠가 딸을 죽게 한다는 말에 분노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하지만 빌은 이내 평정심을 찾고 조를 설득한다. 사랑에 빠진 조는 설득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가 빌에게 자신의 계획을 얘기한 것은 합의를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통보였다. 빌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단 한 번의 포기나 절망이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 보여주는 분노 역시 그의 통제 하에 있었다. 어떻게든 자신의 소중한 것을 뺏기지 않으려는 강한 투지가 있었다. 그것은 조급함보다 노련함으로 정리되어, 치기 어린 고집의 조를 끝내 설득시킬 수가 있었다. 빌은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가진, 깊고 강한 눈빛을 가진, 매우 닮고 싶은 모습의 사람이었다.

 

빌이 일궈낸 것

  조가 빌에게 얻고자 한 것은 배움이었다. 빌이 일생동안 키워온 성품과 자세는 그의 눈빛 안에 모두 담겨 있었다. 그의 눈을 통해 세상을 해석하고, 자신만의 해석을 가지고, 단호한 결론을 내렸다. 자신이 내린 결론에 대한 도전을 받을 때는 가볍게 움직이지 않았다. 묵직한 하나의 움직임을 준비했다. 어떤 실패나 시련이 있을 때, 그것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나 상처를 받고 반응한다. 중요한 것은 실패나 시련이 자신을 얼마나 깎아내릴지 결정하는 일이다. 가만히 두면 실패나 시련이 나를 한없이 깎아내리기도 하고, 사실 실패나 시련이 직접적으로 나를 깎아내리는 건 생각보다 조금인데, 오히려 내가 자멸적인 습관으로 나를 계속 더 깎아내리기도 한다. 자기중심이 필요한 것은 이런 때이다. 필요 이상으로 내가 깎여내려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기 위해서이다. 어떤 일은 일단 그냥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기 위해서, 그리고 가만히 그것을 살펴보며 그 문제에 관한 나에 좀 더 집중하기 위해서이다. 

 

  빌은 언젠가 조가 한 말을 다시 조에게 돌려주었다.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해서, 자신의 생각을 더 지지해 줄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하는데 인용해서 썼다. 외부의 자극이 내 안에 들어와 충분히 그 본질적인 의미가 인지된 후, 다시 내 표현으로 발화될 때의 힘은 강력하다. 최진석 씨의 말처럼 우리가 하는 학습은 모두 자기표현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기표현이라는 것은 어떤 외부 자극이 충분히 자기화 됐음을 증명해 주는 증거임과 동시에, 우리가 궁극적으로 외부자극을 수용하는 본질적인 이유이다. 모든 배움은 나만의 논리, 일관성, 내 생각의 꾸러미를 완성시키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꾸러미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어떻게 행동할지 스스로 결정하기 위함이다. 빌과 같은 사업가는 자신의 기업에 자신이 완성한, 혹은 완성해 가는 생각의 꾸러미를 담는다.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에 그것을 담아, 작품을 보는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극하고, 대화를 불러일으킨다. 사업가가 기업을 통해서든, 예술가가 작품을 통해서든, 모두 자신이 만든 결과물을 통해 세상의 평가를 기다린다는 측면에서 그들은 세상에 말을 걸고 있다. 그들이 일궈낸 하나의 생각 꾸러미로 말이다. 우리는 이것을 비전이라 부르기도 하고, 철학이라 부르기도 한다.

 

빌이 남긴 것

  결국 빌이 조를 설득했을 때, 그가 조에게 들은 표현을 다시 조에게 돌려주었을 때, 빌의 생각은 조에게 전이되었다. 설득에 대한 빌의 투지와 그 의미를 마지막까지 진심으로 되새긴 조의 힘이 합쳐져서 생각이 전이되었고, 조는 빌에게 기대했던 배움을 얻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조가 했던 말이 그가 사랑한 빌의 딸, 수잔의 입을 통해 다시 나오면서 조의 생각이 다시 전이된다. 그렇게 좋은 생각과 태도는 좋은 사람들에게 전이되고 전파된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명성은 어쩌면 이 전이, 전파의 부산물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에게 내 생각을 옮았을 때, 자연스럽게 뒤따라 오는 것이 명성이다. 누군가를 감화해서, 그들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도록 만드는 것이 명성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니 사람들이 왜 그렇게 명성에 집착했는지가 조금 이해가 됐다. 사실 중요한 것은 나중에 누군가 내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했던 생각의 방식이 그 누군가에게 스며들어, 그 누군가의 생각의 방식 일부에 내 생각의 흔적이 남는 것이다. 나의 분신 같은 내 생각의 꾸러미가 다른 생각의 꾸러미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의 움직임에 내가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충분히 자부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존재가 의미가 었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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