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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여인의 향기] : 진실성의 진실

by 리질리언스 2023. 5. 7.

  주인공 슬레이드(알 파치노)는 '조 블랙의 사랑'의 빌(앤서니 홉킨스)만큼이나 강한 목소리와 눈빛을 가지고 있지만, 그의 내면은 그렇게 안정적이지가 않다. 오히려 불안하고, 이제 끝을 보고 있다. 어떤 면에서 그는 많은 지혜를 가졌지만, 그것을 굵고 힘 있는 목소리로 발사하는 것만큼 스스로 가치 있게 느끼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때론 남들에게 훌륭한 말이, 그 말을 하는 자신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한 것들이어서 그다지 별로 의미 있게 느껴지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런 것들은 주변에서 발견해 주고, 세상의 빛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찰리가 슬레이드에게 그 빛을 가져다주는 도움이었다.

 

빛이 사라져 가는 점

  누군가의 말처럼 슬레이드는 그의 젊은 시절에, 전성 시절에 꽤 망나니였던 것 같다.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제멋대로 살다가 자신의 오만함으로 승진에서 누락되고 시력을 잃게 되었다. 아마도 생각의 시간은 그 이후부터 시작되었겠지. 생각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것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겠지. 그리고 그런 생각의 끝에, 어떤 것은 기존의 생각이 정리되기도, 어떤 것은 과거의 행동이 후회가 되기도, 그래서 인정하긴 싫지만 나직하게 내가 틀렸음을 받아들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후회와 인정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으로 차갑고 건조하게 재확인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구나, 더 있어야 할 의미가 없구나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나는 나의 규칙대로 살았고, 어떤 것은 잘못됐고, 잘못된 것을 인정하고 나니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을 것이다. 바꾸기엔 늦었고, 도움조차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틀렸든 맞았든 어떤 강한 규칙을 따르며 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 일관성을 유지하며 강한 자기 색깔을 만들고, 그것을 눈빛과 목소리에 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그중 어떤 것은 틀렸었다고 인정하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인정해 버리면, 특히나 늦은 나이에 그렇게 인정해 버리면, 그간 나의 시간들이 부정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내 존재의 이유가 부정되고, 가치에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 시작할 용기나 나지 않기 때문이다. 용기를 잃었을 때,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간과하기 쉽다. 슬레이드의 눈빛, 목소리, 그가 가진 어떤 생각들은 어떤 사람들에게 충분히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쓰일 것들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것들의 가치를 스스로 발견할 만큼의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많은 가능성이 있는 사람도 이렇게 매몰될 때가 있다. 자신이 가치 있는 것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지 잊고 있을 때가 있다. 

 

어떤 미련한 점 

  누군가의 가치를 발견해 주는 가장 효과적인, 가장 진실된 방법은 그 가치가 다른 누군가에게 필요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창의성은 세상에 무심하게 흩어져있는 많은 점들을 잇는 거라고 스티브 잡스는 말했다. 각각의 점은 혼자 반짝이고 있을 때도 의미가 있지만, 그것이 그 점이 가진 잠재력의 전부는 아니다. 그 점이 다른 점과 이어져 다른 새로운 형태와 관계를 만들 때, 점의 가치는 다른 차원으로 점프한다. 

 

  어떻게 보면 찰리의 고민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닐 수 있다. 사실 나에게는, 불량한 행동을 한 친구들을 밀고하지 않는 것이 미련해 보이기도 한다. 심지어 그런 행동이 자신에게 찾아온 큰 이득을 물리치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답답하다. 그리고 나중에 슬레이드가 이것을 integrity(진실성)라고 부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진실성이라는 것은 정직하고 도덕적인 원칙을 따르는 것이라는 사전적인 정의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찰리의 행동은 오히려 있는 그대로를 말하고 있지 않는 것이었고, 친구를 밀고하는 것이 과연 어떤 도덕적인 원칙에 위배되는 것인지 이해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점과 점이 이어질 때

  하지만 어쩌면 intergrity는 그 이상의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 다른 사전적인 정의인 '분리되지 않고, 전체인 상태', 그러니까 작은 것들의 옳고 그름을 떠나 모든 것을 합쳐서 볼 때 전체가 갖는 일관성과 그 안에 내재하고 있는 진정성일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이렇게 되면 중요한 것은 각각 사건들의 옳고 그름보다 그 사건들의 합을 자신이 어떻게 해석하는가가 중요해진다. 그리고 이 해석을 온전히 자신의 생각대로, 본능대로 내릴 수 있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왜냐면 그런 생각과 본능들이 앞으로 내 모든 삶의 커다란 기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가 슬레이드가 가진 점이 찰리의 점으로 이어지는 지점이었다. 찰리의 가치가 필요해진 지점이었다. 누군가가 온전히 자신의 가치를 지킬 수 있도록 돕는 것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가치 있는 일이다. 대개의 경우 옳고 그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그것은 입장과 해석의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에 대해 '온전한 내'가 되는 것은 꽤나 용기 있고, 꽤나 축복받은 일이다. 온전한 내가 되었을 때, 중간에 잠깐 스텝이 엉키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게 탱고이고, 여전히 탱고는 잘 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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