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영화 리뷰 [슬픔의 삼각형] : 평등이란 신 포도

by 리질리언스 2023. 8. 15.

실현된 적 없는 개념

  처음에 여느 페미니즘 영화인 줄 알았다가 이내 그게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된다. 성 역할에 대한 질문의 시작은 대개 억울함이다. 평등하지 않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요즘 시대에 평등은 누구나 당연히 지켜져야 한다고 믿지만 사실 그것이 실현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심지어 그 정의마저도 쉽지 않다. 모든 걸 같게 맞추기에는 우리는 저마다 시작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 자본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고용주와 고용인, 남자와 여자. 그들이 시작한 조건이 다르고, 놓여있는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게 진짜 평등인가라는 논쟁을 할 때면, 그나마 안전하게 도출되는 결론은 '기회의 평등'이다. 딴 건 몰라도 기회는 동등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실현될 수 있는 것일까. 같은 사건도 어떤 사람에게는 기회가 될 수도 어떤 사람에게 아닐 수도 있다. 가난한 사람에게 1억은 도약을 위한 좋은 기회일 수 있지만, 조만장자에게 1억이 그만큼의 의미를 가질까.

 

  주인공 칼(남자)이 야야(여자)에게 바랐던 평등은 사실 같은 돈을 쓰자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남자가 저녁값을 지불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는 시선'이 싫었던 것이다. 그 시선의 근저에는 남자는 이렇다, 여자는 이렇다 하는 사회적인 통념과 편견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개념적으로'는 평등하지 않다. 요즘시대에 들어맞는 딱히 '일반적인' 근거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야야 역시 그 통념과 편견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남자가 저녁값을 지불하는 게 당연하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고, 단지 계산서가 오는 것을 못 봤다고 둘러댔지만, 사실 이건 거짓말이었다. 재밌는 것은 결국에는 그녀가 그것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그것도 캐주얼하게, 웃는 얼굴로 말이다. 

 

평등의 차원들

  겉으로는 같아 보이지만 디테일에 차이가 있는 몇 가지 상황을 생각해 보자. 1. 남녀가 단순히 일회적으로 저녁값을 계산하는 상황과 2. 결혼할 상대를 찾고 있는 남녀가 저녁값을 계산하는 상황과 3. 임신과 출산을 할 경우에 경제력을 상실할 가능성이 높은 사회에 살고 있는 여자과 그런 제약이 상대적으로 적은 남자가 저녁값을 계산하는 상황은 엄연히 다르다. 1번에서는 단순히 카드전표에 누구 이름이 찍히냐는 문제일 수 있지만, 2번에는 다른 사람이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개인적인 결혼관이 개입될 수 있고, 3번에서는 사회적인 제도와 장기적으로 봤을 때 재정적인 기회의 관점으로까지 접근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남녀의 저녁값 결제에서 함부로 평등을 논할 수 없는 이유이다. 야야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녀의 행동 역시 평등의 기준에 위배되지 않는다. 

 

  이쯤 되면 평등이라는 말이 너무 모호하고 어려워진다. 모든 사람, 모든 상황을 고려한, 모든 것이 공평한 상황이 있기나 할까. 어쩌면 평등, 공평이라는 말은 사회 구성원의 심리적 만족감을 위해, 그것을 통한 사회의 안전을 위해 발명해 낸 아주 영리한 개념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여기서 또 재밌는 건, 사람들은 모두가 이렇게 좋은 개념인 평등을 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반대로 '결국은' 모두가 평등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끊임없이 '남들보다' 잘 살고 있음을 과시한다. 돈이 있으면 굳이 필요가 없는 것에도 써야 제 맛이고, 권력은 부려야 내가 남보다 강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사람들은 '내가 누군데'하고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것을 위해 계속 다름을 찾는다. 우월함을 드러내려 한다. 

 

자본주의 시대의 신 포도

  요즘 세상에 평등은 사람들에게 무엇일까. 종국에 여유만 생긴다면 어떻게든 평등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평등은 애초에 무엇이었을까. 평등은 내가 약자였을 때만 좋은 개념이다. 내가 강자의 입장에 있으면 평등만큼 귀찮은 개념이 없다. 크루즈에서 무인도로 환경이 변했을 때를 보면, 누가 평등을 귀찮아하는지가 보인다. 그녀가 새로운 강자이다. 그리고 역시나 인간의 역사는 반복되듯이 여기서도 약자들은 평등을 부르짖는다. 하지만 이들도 그러다 자신들이 어느 정도 여유를 갖게 되면, 남들보다 우월함을 보이기 위해 이내 평등함이라는 개념을 잊을 것이다. 칼이 새로운 권력 쟁취의 수단을 발견하면서 남들과 평등하지 않은 것을 '그럴 자격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은 갖지 못한 것이 있을 때 평등을 주장한다. 그리고 갖지 못한 것이 있을 때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우리는 마치 그것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우리가 '우리가 비난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것'을 갖는 것이다. 더 이상 평등을 부르짖지 않아도 될 처지에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평등을 귀찮아하게 될 만큼 남들보다 나아지고 싶다.

 

  그러고 보니 평등이라는 건 가장 빨리 벗어던지고 싶은 최소한의 안전망이다. 어느 선까지는 필요하지만 그 선이 넘어가면 멀리 두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가진 사람들에게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부러움을 느끼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 쉽다. 이 사람의 평등에 대한 주장은 '정의를 향한 외침'으로 보이기보다, '부러움을 감추기 위한 세련된 수단'처럼 보이는 것이다. 정의로운 척 평등을 외칠 때는, 가지지 못한 것을 애초에 바라지 않았던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것을 갖고 싶었는데 그동안 못 가졌을 뿐이다. 여우의 신포도처럼 말이다. 만약 이 사람이 정말로 '사회적인 정의'를 위해 평등을 외쳤다면, 그가 여유로워진 뒤에도 아무도 그의 상태가 나아졌음을 모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 순간이 되면, 더 이상 평등을 주장해도 되지 않은 사람이 됐음을 얘기하고 싶어 진다. 그러면서 인스타그램을 다시 열게 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