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는 더 이상 나아질 게 없고 안 좋은 쪽으로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때가 되면 그동안 숨겨 왔던 내 모든 단점과 미래에 대안 불안 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앞으로 나가는 단 한 걸음을 내딛기가 힘들어 보일 때, 이제 나에게 희망은 없다고 느껴질 때. 영화의 주인공 찰리는 그런 시간을 맞고 있다.
삶이 무너질 때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 나에게 전부였던 사람을 잃게 되면 내 많은 것이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다. 그와 함께 했던 시간과 생각들이, 내 안에 있던 그 많은 것들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람을 잃으면 그 사람과 함께한 기억 속에 있는 나를, 그 사람 이전의 나와 구분하기가 힘이 들다. 그래서 그걸 빼고 나면 원래 가지고 있던 나를 찾기 힘들 지경이다. 그렇게 나는 없어지는 것 같고, 이제는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찰리는 그렇게 무너졌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마음이 망가졌고, 그래서 몸도 망가졌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힘을 내서 잘 챙겨 먹고, 조금씩 운동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에게는 그런 생각조차 너무 버거웠나 보다. 오히려 그렇게 자신을 망가뜨려서라도 죽은 사람을 애도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만큼 그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많은 것을 내주었다. 찰리는 가족을 떠나면서까지 그의 사랑을 좇았고, 결국 그건 그 사랑을 잃었을 때, 그만큼 크게 감당해야 될 것이 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찰리가 자신의 딸 엘리에게 연락할 수 있었을 때는, 이제 자신의 마지막을 감지했을 때였다. 딸 엘리를 사랑하는 마음은 계속 컸었지만, 그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것은, 그가 좇았던 사랑 때문에 무너진 자신을 딸에게 보여주기 싫어서였던 것 같다. 엘리 역시 그의 연인만큼이나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었을 테니 말이다. 어떤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랑은 저버린 적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랑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마지막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생을 정리하는 시간에 누군가 찾을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 마지막을 보여줄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행복을 바라줄 사람이 있다는 것에서 나의 존재했던 의미를 찾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건 어쩌면 내가 아주 실패하지는 않았다는 스스로에 대한 증명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찰리에게 딸 엘리는 그런 존재였다. 자신의 마지막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 마지막으로 가져가고 싶은 기억.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나를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찰리에게 이런 누군가가 있는 것이 좋았다. 계속 무너져 내리던 삶이었지만, 희망을 잃어버린 삶이었지만, 마지막에 작은 희망을 찾은 거 같아 다행이었다. 내 생각을 전달해 주고, 그 생각이 그 사람의 일부가 돼서 또 다른 삶이 이어질 수 있다면, 최소한 내가 없어진 이후에도 나는 완전히 소멸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나 보다. 그래서 찰리는 딸 엘리의 가능성을 그렇게 밝혀주고 싶었나 보다. 자신이 괜찮은 사람인 걸 잊지 말라고, 지금은 그냥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일 뿐 사실 훌륭한 사람이 안에 숨어있다는 걸 잊지 말라고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엘리가 좋은 사람이 돼서 자신이 못했던 것을 이어나갈 수 있게 말이다. 행복하게 사는 것 말이다.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도록
찰리의 친구 리즈가 그랬다.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구원할 수는 없다고. 하지만 찰리는 말했다. 딸 엘리는 누군가를 구하려 했던 거라고. 엘리가 했던 행동이 악의에서 나온 건지, 선의에서 나온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선의라고 찰리처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계속 응원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의 엘리도 언젠가는 바뀔 수 있다고 희망을 가져 본다. 찰리가 실제로 엘리가 선하다고 믿든, 아니면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엘리가 자신의 딸이기 때문에 좋게 말해준 것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희망이라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쪽으로 믿어주고, 좋게 말하고 행동해 줄 때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행동 뒤에 다른 행동이 미리 정해진 것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의 행동을 봤을 때, 주변의 반응을 보게 되고 그 이후 다음 행동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이의 해석과 믿음이라는 것이 다음 행동이 어떻게 될지를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엘리의 행동은 선교사의 삶에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찰리는 그런 엘리에게 자신을 믿으라고, 솔직해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다 괜찮다고, 좋은 글솜씨를 가졌다고, 넌 훌륭한 아이라고. 모든 것을 잃었음에도 찰리가 마지막에 그 말들을 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그것이 찰리 스스로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이기 때문에 그런 용기가 났을지도 모른다.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는 마지막이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아쉬운 것은, 조금 더 일찍 그랬으면 어떨까 했던 점이었다. 찰리가 엘리에게 했던 말들을 조금 더 일찍 찰리 스스로에게도 했으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고 느껴질 때도 우리는 생을 계속해야 한다. 리즈의 말이 맞다고 해도, 우리가 다른 누군가의 삶을 구원할 수는 없다고 해도, 최소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는 있다. 스스로를 믿어주고, 좋은 말을 해주면서 말이다. 그러다 힘들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찰리가 리즈의 도움을 받았듯이 말이다. 다만 찰리가 스스로를 돕지 않을 때 리즈의 도움이 주는 영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구원은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다. 마지막 찰리의 몇 걸음처럼 말이다. 힘들 때는 그렇게라도, 그렇게 꾸역 꾸역이라도 버텨나가다 보면, 한 걸음이라도 내딛다 보면, 그렇게 힘내라고 나를 잘 다독여준다면, 무너져내리는 시간을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다시 희망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