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원래 제목을 직역하자면, ‘나 쉬운 남자 아니에요’이다. 그동안 흔히 들었던, ‘나 그렇게 쉬운 여자 아니에요’를 남녀의 사회적인 관계가 바뀐 상황에서 남자가 하는 말로 바꿔놓은 것이다. 남녀의 사회적인 관계는 한국보다 훨씬 선진적이라 생각했던 프랑스에서도 이런 영화가 나오는 걸 보면, 거기에서도 남녀의 불평등한 상황은 여전한가 보다. 적어도 영화가 개봉된 2018년까지는 말이다.
예상치 못한 친절
예전에 프랑스에 잠깐 살았던 적이 있다. 우리나라 문화에 익숙한 내가 보기에 남성과 여성의 권리와 사회적인 태도는 거의 동등해 보였다. 일하는 곳에서 여성의 발언권이나 성공의 정도도 남성에 비해 여성이 특별히 차별받는다고 느낀 적은 별로 없었다. 오직 능력에 의해서만 평가되는 곳이라고 느껴졌다. 신체적인 차이 때문에 극복할 수 없는 출산과 육아에서 발생하는 문제도 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인 장치들이 잘 만들어져 있다고 느껴졌다.
그러다 ‘마레지구’라는, 성소수자들이 꽤 많이 있는 곳에 간 적이 있는데, 이전에 다른 곳에서 느끼지 못한 느낌을 받았다. 유럽 사람들이 처음 본 사람에게도 가볍게 ‘안녕’이라고 인사해 주는 것에는 워낙 익숙했지만, 그곳은 유독 남자인 나에게 친절했다. 한 번 더 웃어주고, 말도 걸어주고, 굳이 요청하지 않은 친절도 베풀어주는 느낌이랄까. 그곳에서 나는 더 잘 대접받는 느낌이었다. 한 거 없이 뭔가를 공짜로 받는 느낌이었다.
불평등에 대한 영화를 보고 갑자기 마레지구 기억이 떠올랐던 건, 불평등의 의미에 대한 의문이 들어서이다. 부당하게, 남들과 동등한 대우받지 못한 것이 불평등이라면, 한 것 없는데 남들에게 더 잘 대우받는 건 뭐라고 불러야 할까. 좋은 대우를 받는 당사자야 불만이 없기 때문에 이걸 불평등이라고 부르진 않을 테지만, 만약 같은 조건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그만큼의 좋은 대우를 받고 있지 못했다면 그들에게는 이것도 역시 불평등으로 생각될 것 같다.
미묘한 불평등
살면서 꽤 오랜 시간 불평등에 대해 생각해 봤고, 모두가 공정한 대접을 받는 사회를 꿈꿔보기도 했지만, 그리고 그것이 정의로운 사회라고 생각하지만, 점점 그 사회를 만드는 건 참 쉽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대단한 사회적 불평등의 예를 떠나서, 나조차도 예쁜 여자에게 더 호감이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조건’이라면 더 호감이 가는 쪽으로 선택하고, 그러면 상대방은 그만큼의 기회를 더 많이 얻게 되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하는 최선의 노력은 공정한 판단을 위해, '정말 같은 조건’인지는 철저히 확인해야 한다는 원칙을 잃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정도이다.
‘남자는 밖에 나가 일을 하고, 여자는 집에서 애나 봐야지’와 같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관념이나 역사인식에서 비롯된 불평등은 오히려 해결의 방향이 명확하다. 해결이 쉬운 것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교육이나 인식의 전환을 시도해 볼 수 있고, 다 떠나서 그냥 “그건 틀렸다”라고 시원하게 말할 수 있는 경우이다. 하지만 그 시작이 사람과 사람 사이 호감으로 인해 발생되는 ‘미묘한 불평등’은 참 다루기가 쉽지 않다. 어디까지가 호감의 영역이고, 어디까지가 객관적인 판단의 영역인지를 정확하게 구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사람의 판단에 감정이 개입되는 한, 완벽하게 공정한 판단은 매번 이루어지기 힘들기 때문이다.
당연하지 않게
만약 우리가 원하는 게, 모두가 완전히 동등해지는 것, 그것을 위해 우리의 판단에 호감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 혹은 예쁜 여자나 남자가 더 좋은 대우를 받지 않는 것이라면, 현실적으로 웬만해서는 그게 이루어질 것 같지 않다. 왜냐면 호감으로 인해 발생되는 미묘한 불평등을 싫어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강남의 성형외과는 항상 붐비듯이 말이다. 사실 우리는 외모지상주의에 많이 길들여져 있다. 그리고 호감이 판단에 개입할 수 있는 것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는 듯하다.
다만 조심할 건, 그렇게 하는 게 원래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원래 예쁘고, 잘 생긴 사람이 더 좋은 대접을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원래’ 그렇지는 않은 것인데, 너무 거기에 길들여져서 그게 '처음부터 맞는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어디까지가 단순히 개인적인 호감인지, 이 호감으로 인한 판단으로 피해받는 사람은 없는지 관찰하는 것을 멈추는 것. 남자와 여자를 떠나서, 그리고 남들이 흔히 하는 생각을 떠나서, 내 진짜 역할에 대한 질문을 멈추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남자는 이래, 여자는 이래’라는 생각은 남들의 생각을 너무 쉽게 받아들인 습관이 모여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남녀의 사회적인 역할이 바뀌어버린 세상에 들어와서, 처음에는 모든 것에 불만이었던 주인공 다미앵이, 어느 순간 그 세계 사람들이 생각하는 ‘남자다운’ 모습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이다. 여자의 리드를 기다리는 순종적인 모습을 내비칠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가 좋았던 건, 결국 세상에 가진 불만과 질문을 놓지 않은 점이었다. 물론 이건 자신의 ‘원래 세상’에 대한 그리움에서 나왔더라도 말이다. 이유야 무엇이 됐건, 일단 질문하는 것이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당연한 건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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