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영화리뷰 [데몰리션] : 감정의 시차

by 리질리언스 2023. 4. 30.

  어떤 일과 그에 대한 감정이 늘 동시에 오는 것은 아니다. 사실 나는 둘 사이에 시차가 좀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 데이비스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처음에는 그가 아내를 많이 사랑하지 않아서인 줄 알았다. 하지만 사랑하지 않더라도 오랜 시간을 같이 지낸 사람에 대한 상실감은 있을 법 한데, 그마저도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뭔가 마비된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싫어하는 어떤 일이 일어났음에도 그 감정이 바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직 그게 내 삶에 충분히 와닿지 않아서이다. 누군가 떠나는 건 알겠는데, 아직 내 삶은 그 부재를 충분히 못 느끼고 있다. 어떤 것이든 직접 경험해야만 받아들일 수 있는 나로서는 '부재'라는 단어가 어떤 느낌을 주진 않는다. 그보다는, 오랜 시간에 걸쳐 '아 이제 정말 없구나'라는 것이 느껴질 때, 없었던 시간들이 쌓이고, 허전함에 대한 기억이 지속될 때야 비로소 다시 보고 싶음과 외로움이 시작된다. 그때서야 제대로 울 수 있다.

 

  영화 속 건물들이 폭파되어 무너지는 모습처럼, 감정에서도 폭파의 시간과 무너짐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을까. 어떤 일이 발생함과 동시에 그것의 영향을 바로 느낄 수 있는 경우가 나에게는 많이 없는데 간혹 있는 경우는, 아마도 일부러 그러려고 하는 경우이다. 미리부터 작정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려고 할 때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면 자꾸 이게 진짜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슬퍼지려고 슬픈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해야 된다고, 감정이 아니라 머리가 지시하기 때문에 애써 짜내서 슬픈 느낌이다. 

 

  그런 면에서 로봇 같은 데이비스의 행동과 감정표현이 나에게는 좀 진실되어 보였다. 아직 오지 않은 감정에 대해서 오지 않았다고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꽤 자유로워 보였다. 하지만 그도 불안했겠지. 아직 온전히 느껴지진 않지만, 뭔가가 멀리서 오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겠지. 어떤 건지 궁금하기도 두렵기도 했을 것이고, 그 알 수 없는 감정들을 어딘가로, 어떤 방식으로 흘려보내야 했다고 본능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진짜 슬픔이 몰려오기 전에 일어난 일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다.

 

  어떤 사건과 그에 대한 감정 사이에는 시차가 존재한다. 그런데 그 시차 사이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시간을 보내는 것은 쉽지가 않다. 뭔가를 해야 한다고, 느껴야 한다고 강박을 느끼지 않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럴 때는 이렇게 느껴야 한다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방식으로 반응하는 게 진실되어 보이진 않는다. 그렇다고 느껴지지 않은 상황을 숨기거나 억지로 짜내서 느끼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냥 있는 그대로, 감정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차분히 지켜보는 게, 어렵겠지만 가장 나을 것 같다. 사건에 대해 진짜 내 감정이 올라올 때를 위해서 기다리는 게, 나의 일관성과 진정성을 위해 맞을 것 같다. 사건에 흔들리지 않고, 온전히 나를 유지하는 방법인 것 같다. 그리고 이 방법이 필요한 이유는 사건은 이번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