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모든 것은 한꺼번에 몰려온다. 세무당국은 압박하고, 딸과의 관계는 얘기할수록 틀어지고, 남편은 이혼하자 말하려고 한다. 머릿속은 복잡하다 못해 아득해진다. 나는 한 명인데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안 좋은 일이 벌어지는 게 공평한가에 대한 억울함이 든다. 그리고 그 억울함을 참다못해 반대로 생각해 본다. 한 가지 문제에 동시다발적인 내가 달려들어 해결한다면 어떨까. 제목의 에브리씽도 나고, 에브리웨어에 있는 것도 나다. 수많은 내가 한꺼번에 나아간다.
결정 하나에 인생 하나
인생의 기로에 선 것 같은 중요한 결정을 할 때면, 지금 내가 선택한 결정 말고, 다른 결정을 했을 때 어떤 결과가 올지 궁금하다. 다른 결정의 삶으로도 한 번 살아보고 싶다. 물론 이렇게 여러 번 살아보는 것을 못하니까 결정 전에 신중하게 이것저것을 따져보고, 비교해 본다. 하지만, 내가 내린 결정대로 살 때도, 결정 전에 내가 예상했던 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는 건 사실이다. 그리고 늘 남의 떡이 더 커 보이기 마련이라 내가 선택하지 않은 그 결정이 더욱 좋은 결과로 이어질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영화에서는 이렇게 결정의 순간마다 서로 다른 결정이 서로 다른 삶을 만들어 낸다고 가정한다. 그런 여러 삶, 그리고 그 속에 여러 가지의 '나'가 동시에 존재하는 멀티버스 말이다. 여기서 가장 재밌는 순간은 그 서로 다른 멀티버스를 자유롭게 오고 가는 경험이다. 그리고 이 재미를 더욱 배가시켜 주는 설정은 다른 멀티버스에 있는 다른 나의 능력을 지금 여기의 내가 소환할 수 있다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미친 짓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미친 짓도 아니고 엄청나게 미친 짓 말이다.
미친 짓 = 다른 나
사실 다른 세계에 있는 내가 되는 것은 과거의 내가 내린 결정을 번복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내가 살아온 삶을 중단하고,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는 변화의 과정이 너무 순식간에 일어나긴 했지만, 변화의 필요를 자각하는 순간은 보통 오랜 노력 후, 지금의 내가 한계에 부딪힐 때 일어난다. 그런데 이건 마치 굳이 멀티버스까지 가지 않아도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할 만큼 했는데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가 있다. 앞으로 나갈 수도 그대로 멈출 수도 없을 때가 있다. 이럴 때 시원하게 미친 짓 한 번 해보는 건 어떨까 싶다. 기왕에 이렇게 된 거 더 망가질 게 있나 하고 말이다. 어쩌면 정말 더 이상 망가질 게 없다고, 잃을 게 없다고 느낄 때야 비로소, 그만큼 절망적이고 절실할 때야 비로소 이제까지 시도해보지 않은 미친 짓, 새로운 짓을 하기가 더 쉽다. 그리고 이것이 과거의 선택, 과거의 삶으로부터 나를 극복시키는 방법일 수 있다.
아쉬운 점은 그렇게 나를 극복하며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딸 조이를 위한 것이었다. 물론 엄마로서 딸을 지키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것이고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관점으로 본다면 엄마이기 전에 꿈꿨던 자신의 여러 가지 가능성들은 조금 덜 중요하게 그려진 것처럼 느껴까지 한다. 안타까운 점은 그렇게 우주에 있는 모든 자신들을 동원해 허무주의로부터 구한 딸, 조이도 나중에 엄마가 되면 역시나 그렇게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자신의 딸에게 쓸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딸이 엄마를 닮았다면 말이다.
삶 속에도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할 것은 아니다. 나는 차라리 온 우주에 있는 주인공, 나의 가능성들이 다른 나를 향해 갔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 작은 차이일수도 있지만, ‘이것저것 다 해봐도 나도 엄마가 처음이라 어쩔 수가 없었어. 미숙해서 미안해’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이게 최선이었어’라고 보여주는 삶이 더 통쾌했을 것 같다. 그러면 그 모습을 보는 딸도 최대한 자기 알아서 살 것이고, 멋대로인 엄마를 보며 자신의 멋대로임에 더 힘을 받을 것이니 말이다. 왜냐면 문제라고 생각했던 딸의 연인이 여자인 것은 애초에 그리 문제 될 게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여러 기준 가운데에서, 엄마이기 때문에 자신이 무언가 중재를 해줘야 할 것 같은 부담을 느끼기보다 있는 대로 까발리는 게 나을 뻔했다. 될 대로 되라는 약간의 미친 짓 말이다.
그보다 다양한 내가 사는 다양한 멀티버스를 경험했을 때 걱정은, 그 경험 이후 인생이 결국 다 고만고만해 보일 것 같다는 것이다. 이 인생도 살아보고, 저 인생도 살아보니 인생 뭐 별 거 없더라라는 식의 허무주의에 오히려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허무주의 이후 돌아갈 데가 이제 가족 밖에 남지 않아서 가족으로 돌아가는 것은 그렇게 건강해 보이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게 여러 인생의 하이라이트만 살거나 결과만을 평가하는 것보다 하나의 인생에서 작은 디테일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더 충만한 삶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치면 만약 멀티버스는 능력이 있더라도 굳이 모든 삶을 다 살아봐야 할 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으므로 한 인생을 한 번, 꼼꼼히 살아보면 충분할 듯하다. 대신 매번 제대로 미친 짓을 하며 과거의 나를 갱신하면 그걸로 충분히 멀티버스의 욕심은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