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있는 동거
그들이 왜 같이 있어야 하는지 이유는 명확했다. 중국 기업가는 미국 시장 접근을 위한 거점이 필요했고, 미국 직원들은 생계를 위해 일자리가 필요했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이익을 낼 수 없으면 미국에 공장을 세울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낮을 임금을 책정하는 것은 당연했고, 노조의 설립을 원하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노조가 있으면 기업의 요구 조건을 양보해야 할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기존의 지역사회에 있던 공장이 없어지면서 오랜 시간 일자리를 잃은 주민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어떤 일자리든 필요했다. 일자리를 가지지 못했던 시간만큼 그들 삶의 수준은 척박해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인이 경영하는 공장이 들어왔을 때, 그들은 일자리의 조건을 생각할 상황이 아니었다. 무엇이 됐든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무엇이라도 있는 게 나았고, 그것에 감사했다.
이익을 내지 못하면 없애는 게 나을 공장을 가진 기업가와 조건에 상관없이 최소한의 생계만이라도 유지할 수 있으면 됐었던 주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척박한 조건에 있는 사람들을 직원으로 고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중국인도 미국에서 중국 스타일로 경영을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조건을 얘기하더라도 직원들은 일단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그것이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강한 필요가 직원들을 잘 붙잡아 두기 때문이었다.
두 개의 문화
하지만 문화는 필요에 의해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꼭 필요한 것들이 충족되면, 사람들은 그다음의 것을 생각한다. 먹을 음식과 입을 옷이 있고, 편히 쉴 수 있는 집이 생기면 그다음에는 시간에 대해서 생각한다. 최소한의 필요 다음에는 자신의 삶을 누리고 즐길 시간을 필요로 한다. 자신이 가진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확장시킬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런 시간을 확보할 때, 그 시간을 통해 꼭 필요한 의식주 이외의 것들을 추구할 때, 그것이 문화가 된다. 혹은 그런 것들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문화가 된다.
미국 땅에는 미국의 문화가 만들어져 있다. 문화가 지역성과 강한 연관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처음에 지역사회의 공장이 문을 닫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서 새로운 삶의 방안을 찾지 못한 것에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사람들은 자기가 살던 지역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이미 익숙한 사회에서 벗어날 때 극도의 공포를 느낀다. 비록 그 사회에서는 생계를 이어나갈 방법을 찾기 어렵더라도 어떡해서든 본인이 익숙한 장소, 사회에서 방법을 찾아보려고 한다. 여하튼 미국 땅에 만들어진 미국 문화 중, 지역 주민들이 끝까지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은 시간, 존중, 안전, 지속가능성과 같은 가치였다. 없었던 일자리가 다시 생겼을 때의 반가움에, 타협할 수 있는 가치라고 생각했을지는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문화 속에 자리 잡은 중요한 가치는 시간이 지나면서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가치임이 밝혀졌다.
반면에 중국인들에게 미국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필요에 따라 적당히 양보할 수 있는 가치였다. 일이 급하면, 공장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공장의 발전이 곧 나의 발전이라고 생각한다면 충분히 어떤 가치들은 양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들의 문화였다. 개인의 가치보다 집단의 가치가 우선할 수 있는 것. 개인의 행복이 집단의 문화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회사에서 만들어준 결혼식에서 결혼을 하고, 회사의 평가를 통해 개인의 역량을 가늠한다. 회사가 주는 삶의 범위가 인생의 주를 이루고, 나머지 시간은 회사에서의 시간을 위한 충전처럼 보인다. 문제는 미국 땅에서의 문화는 그 반대라는 것이다. 회사는 회사 밖의 시간, 그 중요한 시간을 위해 돈을 벌어주는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회사의 경계를 기준으로 경계선 왼쪽이 회사에서의 삶, 오른쪽이 회사 밖의 삶이라면 중국인과 미국인의 방점은 각각 서로 다른 영역, 왼쪽, 오른쪽에 있다. 처음에 그 둘이 만났을 때는 타협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이 힘들어 보인다.
경쟁과 복지
사실 나는 그 둘의 만남이 실패로 끝나길 바랐었다. 한국의 사회는 어디에 더 가까울까를 생각하며, 중국 방식보다 미국 방식이 성공하길 바랐다. 그것은 내가 내 삶이 회사 혹은 사회의 방식에 잠식되지 않길 바라기 때문이고, 내 삶의 결정권이 보다 나 자신에게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과거의 한국은 중국의 방식과 더 같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은 빠른 속도로 미국의 방식에 따라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마치 영화 속 중국과 미국이 만났을 때와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회사가 전부이길 바라는 상사와 회사보다 회사 밖의 삶이 더 중요한 신입직원들. 이 둘의 만남에서 생기는 갈등 속에서 결과적으로 평화롭게 후자, 즉 신입직원과 미국이 이기길 바라고 있었다. 모두가 합심해서 후자의 방식으로 변할 수 있다면, 모두가 개인의 삶이 더 중요하다면, 회사 혹은 사회 역시 더 이상 다수를 위해 개인의 삶에 대한 희생을 강요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면 모두가 삶의 자기 주체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본주의 사회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경쟁을 하는 곳이다. 그리고 각각의 사람들이 처한 각각의 조건은 다르다. 어떤 사람은 큰돈보다 당장은 약간의 돈으로 만족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혼자 있을 시간보다 회사에 나와 누군가와 함께 있는 시간을 더 즐긴다. 어떤 사람은 자발적이고 진심으로 다수가 지향하는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한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어떤 경쟁의 시장에서 남들보다 좀 더 유리한 위치에 있을 수 있게 된다. 개인의 삶을 위해 주장하는 것이 적고, 보다 적은 임금으로도 만족할 수 있고, 회사 혹은 집단의 의도에 보다 호의적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신입직원과 미국의 방식은 어떤 식으로든 추가적인 도움이 없이는 이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가 힘들다. 그들은 욕심쟁이와 투덜대는 사람으로 낙인찍힐 뿐이다.
역사적으로 경쟁과 복지의 개념을 늘 싸워왔었다. 경쟁은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이고, 개인의 능력 또한 향상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경영자는 직원들 사이에 경쟁을 일으키려 노력한다. 그것은 강압이 아닌 세련된 방식의 채찍질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런 경쟁은 어느 정도까지는 집단에 좋은 영향을 끼치지만, 이것이 과해질 경우 꼭 문제가 발생한다. 남들보다 잘하는 것만이 인정받는 사회에서는, 경쟁에서 이기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은 소외되기 쉽다. 인간성, 복지, 지속가능성과 같은 단어들은 당장 이기고 지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단어들이 과하게 무시되었을 때, 인간은 결국 무너지고 만다. 인간은 지지치 않는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고, 인간은 감정과 꿈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은 결국 자신과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에 대해서 고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필요한 것들, 인간이 오랫동안 일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바로 복지의 영역에 있는 것들이다. 사람들은 경험적으로 인간성, 개인의 삶과 의미에 대해 외면했을 때, 그들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숙고의 유산
문제는 이런 깨달음은, 경쟁과 복지 사이의 둘 중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수많은 싸움 이후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수많은 싸움들 속에서 진 편도 이긴 편도 자기 버전의 생각을 정립하게 되고, 각 상황에 맞는, 현실적인 범위의 자기주장을 하게 된다. 오랜 세월 동안 싸움을 반복하며, 대략 어느 범위에서 경쟁과 복지가 이루어져야 하는지 합의를 본다. 이것은 충분한 경험과 오랜 숙고 이후 정해진 것이기 때문에, 이 합의에 도달한 사회의 중요한 유산과 같은 것이다. 이 과정을 함께한 사람들은 어느 쪽을 강조하든, 같이 참여하는 싸움 속에서 하나의 문화 범위에 들어있었다. 싸움을 공유하면서 서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간의 싸움을 공유하지 않았던, 이제까지의 싸움 방식과 전혀 다른 싸움을 하는 진영과 갑자기 싸워야 할 경우는 어떻게 될까.
과거 스위스 회사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는 친구가 얘기해 주었다. 자신은 정해진 시간보다 일을 너무 많이 해서 경고를 받았다고 한다. 회사 인사팀의 입장에서 회사가 노동부로부터 처벌을 받을까봐 과도한 근무시간을 관리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만, 중요한 건 같이 일하는 동료들도 그의 과한 업무 시간을 진심으로 싫어했다는 것이었다. 자발적으로 근무시간을 늘리는 것이 칭찬받는 우리나라 문화 기준으로 봤을 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그 친구 동료가 한 말에 이해가 되었다. 지금 있는 근무시간과 그것을 지키는 문화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들이 싸워서 달성한 것인데, 이방인인 네가 와서 그것을 망치려고 하는 것이냐는 거다. 현재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보다 지속가능한 경쟁을 위한, 그리고 나 이후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경쟁의 방식에 대한 숙고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그 고민의 수준이 부러웠다.
영화의 마지막은 결국 중국경영진의 승리로 끝난다. 그들은 형식적인 임금 상승만 허용했고, 노조의 설립을 막았으며, 직원들은 이후 다른 사람뿐만이 아니라 로봇과도 경쟁하게 되었다. 결국 다시 한번 지게 될 싸움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회사는 다음 해부터 흑자를 낼 수 있게 되었다. 미국 직원들은 애초에 질 수밖에 없는 싸움에 있었다. 복지에 대한 갈망보다 생계를 위한 필요의 크기가 더 컸기 때문이었고, 이 필요는 사실 다른 대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회사는 이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주장을 끝까지 고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금 무서운 것은 이것이 그들만의 싸움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싸움에 쳐했을 때, 나는 얼마나 여유 있는 싸움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이 들어서이다. 싸움은 늘 일어난다. 어른들의 싸움에서는 여유가 중요하다. 그리고 여유를 같기 위해서는 다양한 카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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