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가 남긴 것
우리가 날카로운 이유는 대개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내가 얼마나 약한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고는 예기치 못하게 터지고, 발가벗겨진 나 자신에 대한 기억이 상처로 남는다. 그리고 한 번 그렇게 상처를 받으면 그것이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어 그다음부터는 나를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 잡힌다. 비슷한 경우를 겪을 때면 온통 그 생각만 난다. 나를 두꺼운 갑옷으로 꽁꽁 싸매고, 더 이상 상처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 새로운 접촉을 거부하게 된다. 안전할 수는 있지만, 사실상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상처를 가지고 있는 마음이 안타까운 것은 그것이 강한 선입견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부터 그것은 이럴 거야 하고 결론지어버리는 것이다. 처음에 아무런 선입견이 없을 때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었지만, 어떤 관계든 할 수 있었지만, 한 번 선입견이 생기고 나면 세상을 보는 시야가 굉장히 좁아진다. 내가 보려고 하는 방향과 관계에 정답이 이미 시작부터 정해져 있다. 그래서 내가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은 줄어들고, 주변에서도 그런 나를 보며 대화하거나 같이 호흡하려는 것을 피하게 된다. 주변의 좋은 자극이 없으니 나는 더욱 정체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나는 점점 고립되고 굳어져 간다.
우리는 대개 상처를 약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과거의 상처를 핑계로 내가 보호하려는 것이 상처 자체일지, 아니면 그와 상관없이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약점이나 자격지심일지는 잘 따져봐야 한다. 어떤 상처 때문에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져버렸다고 말하기 전에 사실 그 일과 상관없이 내가 원래 그렇게 바뀌기를 전부터 바랐던 것은 아니었는지 따져봐야 한다. 어떤 상처는 생각과 삶 전체를 바꿔버리기도 하지만, 어떤 상처는 원래 바뀌려던 내 마음에 촉매제로 작용할 뿐인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 어쩌면 사실 나는 그런 상처를 기다려 왔는지도 모른다. 내가 스스로 그렇게 바뀌는 것에 대한 책임을 회피를 위해서 말이다.
상처의 고리
주인공 밀드레드는 상처를 입었다. 자식을 잃은, 씻을 수 없는 상처이다. 그 상처는 너무나 커서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기에 충분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 모든 면에서 이전과 달라졌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부분에 있어서 그녀의 잘못된 행동에도 면죄부를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살아갈 날이 1년이 채 남지 않은 사람에게, 오히려 죽기 전에 어떤 일을 하도록 재촉하는 행동에 모두가 부정적으로 생각할 테지만, 그것이 자식을 잃은 어미의 행동이었다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면죄부를 어디까지 줘야 할까. 그녀의 상처가 충분히 컸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고 어느 선까지 용인해 줄 수 있을까.
누군가 어떤 상처를 받았다고, 그 상처에 계속 매몰되어 있게 내버려 두기에 우리의 삶은 너무도 얽혀있다. 그렇기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이 그것 때문에 스스로 침잠할 때도,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오히려 주변에 더 큰 상처를 내려할 때도, 상처를 핑계로 그와 상관없는 자신의 행동을 포장하려 할 때도, 그 주변 사람들은 끊임없이 반응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상처에 매몰된 행동은 주변에 다른 상처를 낳는다. 영화 속, 증오는 더 큰 증오를 부른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당사자는 의식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상처 역시 굉장한 에너지이기 때문에 그것에 매몰됨이 강할수록 주변에 쉽게 옮아간다.
우리가 가진 삶의 고리는 어떤 고리든 될 수 있다. 그리고 상처의 에너지가 만든 고리는 상처의 고리를 만든다. 문제는 그 고리는 서로 연결되어 내가 만든 에너지가 결국 나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간혹 그 돌아옴의 방식이 특이할 때가 있다. 누군가에게 상처 주고 싶을 만큼 미워했던 마음이 사실 오해에서 시작된 것이었다든가 아니면 내가 상처 낸 사람에게 내가 도움을 받아야 할 때도 있다든가 말이다. 혹은 나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나의 존재가 그 부정적인 에너지 자체로 남에게 상처가 될 때도 있다. 그렇게 삶의 고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가지고 우리의 관계가 뒤범벅이 되게 한다.
상처로부터의 자유
다행인 건, 상처를 받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반응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받은 과거의 상처에 오랫동안 매몰되는 반면, 어떤 사람은 금방 훌훌 털고 일어난다. 어떤 사람은 과거의 기억을 절대 잊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그냥 가볍게 넘기거나 무시하고 만다. 상처가 될만한 일을 오래 기억하지 않는 것이, 그 일에 대한 애정이 없어서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보기 시작하면, 주변에 온통 자기 일에 애정이 없는 사람들뿐인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애정이 없어야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이 보인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적당히 애정을 없애고 살아가는 것이, 상처를 받지 않고 혹은 상처를 받더라도 그것을 금방 극복하고 지속가능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긴 하다. 이 말이 너무 성의 없게 들릴 수는 있지만 어쩌면 이건 일종의 기술 같은 것이다. 내가 하는 일, 내가 속한 집단,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적당히 거리두기. 유명한 자기 계발서에 나오는 것처럼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열망을 갖는 것과 정반대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강조되는 열망에서도 시련이 올 때 그것에 매몰되지 않고, 처음의 의지를 유지하라고 강조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적당한 거리 두기의 의미를 마찬가지로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열망하는 대상에 대한 포기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대상이 내게 주는 실패나 시련과 같은 속성에서 거리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원하는 건, 사실 애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애정에 매몰되지 않는 것이다.
내게는 월러비가 그런 사람처럼 보였다. 상처를 받았음에도 거기에 매몰되지 않는 사람, 그렇다고 자신의 애정에도 매몰되지 않는 사람말이다. 그는 자신에게 남아있는 시간에 휘둘리지 않았고, 가족과의 관계에 휘둘리지 않았고, 자신의 능력에 대한 주변의 비방에도 휘둘리지 않았다. 그런 것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중심을 잃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묵묵히 해나갔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으며, 생각한 대로 살았고, 해야 할 말들을 남겼다. 어쩌면 정말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는, 그것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랬을 때 대상에 대한 담담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고, 그것을 지속하기가 더 쉬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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