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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리뷰 : 억울함과 서운함 사이

by 리질리언스 2023. 7. 29.

어떤 사람과 다른 사람의 차이

  두 사람이 대화를 한다. 어떤 사람은 대화에서 '사실'을 말하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대화에서 말의 '의도'를 말하는 게 중요하다. 별로 중요한 주제가 아닐 경우에 이 둘은 큰 문제없이 얘기할 수 있다. 대화의 주제에 애정이 없을 때 오히려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긍정적인 여유이기도 하고, '뭐 그러든가' 하는 약간의 자조 섞인 여유이기도 하다. 어느 경우든 나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면 'Let it go' 할 수 있고, 그러면 대화는 부드럽게 흘러간다. 굳이 지켜야 할 주장이 없기 때문에 어느 쪽도 대화의 흐름에 집착하지 않는다. 좋은 사회적 대화이다.

 

  문제는 나름 중요한 문제에 대한 얘기를 할 때이다. 앞서 말한 '어떤 사람'은 사실 관계를 정확히 짚고 넘어가는 게 중요하다. 이 사람에게 사실 관계라는 것은 판단을 내리 위한 시작점이기 때문에 이 기초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 자연스럽게 이 사람은 본인이 '사실 관계'라고 생각하는 사항에 대해서는 본인의 해석과 개입을 배제하고 가급적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려고 한다. 이 사람에게 사실 관계의 나열은 나중에 그것들의 합을 통한 판단에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오염되지 않은 사실을 차곡차곡 모으는 것이 대화 전개에서 중요하다. 그래서 대화 도중, 상대방이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른 내용을 얘기하면 그것을 교정하려고 한다. 사실을 사실대로 남겨두는 것은 이 사람에게 굉장히 위험한 대화 방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이 부분이 교정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한다. 문제는 이렇게 사실 관계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한 번 본인이 생각하는 사실과 다른 내용이 나와 버리면, 그것을 (본인이 이해하는 선에서 사실이라 생각하는 방식으로) 제대로 교정해놓지 않으면 그다음 대화 전개가 안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 사람과 대화하는 상대방, 그러니까 '다른 사람'은 갑자기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 그는 당장의 미묘한 사실 관계에 대한 교정이 크게 의미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각 사실 관계의 디테일한 교정이 아니라 그것들이 너머에 있는, 각 사실들을 해석하는 의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은 일단 사실 관계가 100% 밝혀지지 않더라도, 어떤 것은 사실 관계에 대한 추정에 의지하더라도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각각의 사실의 순수성에 집착해서 그것을 밝히는데 집중하는 것은 애초에 그 사실이 발생하게 한 의도, 혹은 그 사실에 대한 해석의 의도를 밝히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위기의 탄생과 증폭

  '어떤 사람'과 '다른 사람'이 대화를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대화 도중, '다른 사람'이 어떤 사실 관계를 말했는데 '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사실 관계와 다른 경우가 발생했다고 생각해 보자. 이 경우 '어떤 사람'의 뇌 속에서는 대화의 전개가 갑자기 덜컥 멈춘다. '다른 사람'이 사실 관계를 말한 이유는 어떤 큰 주제 속 흐름의 일환이었겠지만, '어떤 사람'은 일단 큰 주제와 상관없이, '본인이 생각하는' 사실과 다른 상황에 대한 설명을 용납할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 사실을 바로 교정해야 다음 내용으로 넘어갈 수가 있다. 이것을 교정하지 않으면 그다음에 나오는 내용에는 집중이 안된다. 그래서 그것을 교정하려는 얘기를 한다. 만약이 이게 교정이 안 된다면 될 때까지 말한다.

 

  여기서 '다른 사람'은 너무 답답하다. 애초에 그가 꺼낸 사실 관계에 대한 얘기는 다른 큰 주제를 말하기 위한 도구였을 뿐인데, 어떤 사람은 여기서 더 이상의 대화 전개를 못하게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에게 '정확한, 아주 정확한' 사실 관계를 지금 짚고 넘어가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닌데 말이다. 그는 다음 얘기로 넘어가려고 하면 집착적으로 아까 그 사실 관계에 대한 얘기로 다시 돌아오는 '어떤 사람'의 이유가 궁금하다. 여기에 어떤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모든 것의 의도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이렇게 이 주제에 대해 '어떤 사람'이 반복해서 얘기하는 것은, '그가 처음에 말한 사실 관계'와 '어떤 사람이 지금 교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실' 사이에 '어떤 사람'의 의도가 숨어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분명히 무슨 다른 의도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이 문제에 집착한다고 생각한다. 

 

  오해가 증폭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사실 '어떤 사람'이 반복적으로 (본인이 사실이라 생각하는 내용으로) 사실 관계의 교정을 원했던 이유는 정말 단순히 그게 사실이라고 믿기 때문이고, 사실은 사실대로 말하고 넘어가야 이후 대화에서 오해가 없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그에게는 사실이 향후 대화를 위한 중요한 기초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자신이 해석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사실을 '나열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교정의 의도 묻게 된다. 뭔가 대단한 다른 의도가 있지 않는 이상, 이렇게 반복적으로, 자신에게는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 행위(치밀하게 사실을 집어내는 행위, 심지어 그마저도 100프로 확신할 수는 없으면서)로 돌아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어떤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냥 그건 내가 아는 사실과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이 행위를 통해 다른 사람을 특정 방향으로 설득할 의지가 전혀 없다. 그는 단순히, 최대한 사실과 객관을 지향할 뿐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어떤 사람이 계속 자신을 어떤 쪽으로 설득하려 한다고 생각한다. 분명 그럴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억울함과 서운함

  심해질 경우 결국 대화는 '나는 단지 아닌 걸 아니라고 했을 뿐이야'와 '그게 지금 여기서 중요해? 왜 내가 하는 말을 안 들어'로 귀결될 수 있다. 대화가 끝난 후, 일단 사실 관계를 밝히고 싶었던 '어떤 사람'에게 남는 감정은 억울함이다. 그의 입장에서 그는 '사실 관계를 밝히지 않고는 다음 내용으로 넘어갈 수 없는' 함정에 빠진 것뿐이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그에게는 사실 관계를 제대로 짚고 넘어가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다. 반면에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좀 과장하면 '사실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문제이다. 오히려 거기에 특별한 의도가 있는 게 아니라면, '쓸데없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자신이 하려는 말의 의도를 파악해 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함정에 빠진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에 이르지 못했고, '다른 사람'은 '어떤 사람'에게 대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받지 못했다고 생각에 결국 서운함을 느끼게 된다. '어떤 사람'이 사소한 것에 집착해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심지어 그게 '어떤 사람의 의도인가'라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서운함은 '다른 사람'의 감정에 굉장히 큰 타격을 줄 정도이다.

 

  사실 두 사람 다 잘못한 건 없다. 그냥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다른 것이다. MBTI로 치면 T와 F를 구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상황에 대해 이해하는 순서와 방식이 다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이 생산적인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혹은 위와 같은 대화의 위기 상황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약간의 팁이 필요하다. 일단 '어떤 사람'을 '사실 관계 밝힘 집착의 함정'에서 꺼내줄 수 있는 건 '다른 사람' 뿐이다. 그런데 이건 생각보다 쉬울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만약 '그건 내가 아는 사실과 달라. 이건 이렇게 바꿔서 말해야 해'라고 말한다면, '다른 사람'은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라고 말하면 된다. 물론 이것에 '다른 사람'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동의했다면 애초에 사실에 대한 둘의 의견 차이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그렇게 두고, 다음 내용으로 넘어가면 된다. 어차피 '다른 사람'에게 중요한 건, 지금 '어떤 사람'이 집착하는 그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동시에 '어떤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사실이, 사실은 그 역시 '자신의 해석'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떤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화 속에서 '상황의 전달'은 늘 말하는 이의 '관점'을 수반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나아가 그 관점이 '다른 사람'에게는 '의도'로 읽힐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사실에 대한 집착'을 놓을 수 있게 된다. 왜냐면 사실, 대화 속에서 '사실'이란 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내 입을 통해 나오는 모든 내용에서 나를 빼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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