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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버니 메이도프] : 가면의 앞과 뒤

by 리질리언스 2023. 3. 20.

  영화(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시리즈)가 끝나고 난 이후에도 찝찝한 기분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던 이유는 이 사기의 끝이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 끝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2008년 금융위기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아마 당시의 금융위기가 없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지금까지 그 사기가 이어져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더 많은 피해자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특히 위기가 있을 때마다 피해자의 수가 이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늘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그 피해 규모는 훨씬 더 컸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사기의 규모가 커지고 커져서 만약 나도 '버니 메이도프'라는 투자회사에 대해 알게 됐다면, 과연 나는 그것이 사기인지 구분할 수 있었을까라고 질문했을 때,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절대 아니다'였다.
 

가면의 앞과 뒤

  사람들은 저마다 상반된 두 가지 이상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와 숨기고 싶은 내가 있다. 우리는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를 앞세워서 사회생활을 한다. 사회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지만, 그것이 '진짜 나'인 경우는 드물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나의 모습과 상반된 나만의 욕구는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 욕구를 모두 드러낼 경우, 사회적으로 배척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적당한 가면으로 위장한다. 그리고 이 가면이 원래의 자신의 본성과 너무 달라지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스스로에게 교육한다. 그것이 사회 속에서 살아남는 지속 가능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가면과 실제 본성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커질 경우, 자아의 분열이 생기고, 언젠가는 사회와 합의할 수 없는, 사회에 드러나서는 안 되는 본성이 드러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간극이 커질수록 자신의 본성을 스스로 통제하기가 힘들어진다. 보통의 사람들은 그렇다.
 
  누군가 주인공 버니 메이도프를 금융계의 소시오패스라고 설명했을 때, 아마도 이 부분에서 그가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니 메이도프는 사회적으로 드러나는 가면과 자신의 본성 사이의 간격이 오랜 시간 동안 점차 크게 벌어졌음에도 자신의 가면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면과 본성 사이의 엄청난 간격을 계속 유지하는 동안 그가 고통스럽지 않았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최소한 그것이 몇십 년 동안 유지될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가 가진 가면은 더욱 사회적으로 성공한 모습, 즉 더 강한 가면으로 발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과연 만약 내가 이런 사람을 만났다면 그의 겉모습에 속지 않고 '진짜 그'를 얼마나 파악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든다.
 

가면을 판별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

  버니 메이도프 주변 사람들에 대한 한 가지 의심은 그들이 버니 메이도프에게 갖는 평가가, 그가 범죄자로 '밝혀졌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아마 그들도 나처럼 모든 것이 밝혀지기 전에는 버니 메이도프에 대해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밝혀진 뒤에야 '맞아 그때 그게 수상했어, 그 점은 이상했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버니 메이도프는 그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필요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는 지속적으로 수익을 만들어주었고, 미래를 보장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은 이러한 이익을 받는 사람들의 기대, 욕심과 결합되어 버니 메이도프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객관적인 판단력을 유지했다면 언젠가는 가질 수 있었던 궁금증에 대해, 그리고 이어서 생겨날 '질문'에 대해 스스로 침묵하도록 만들었다.
 
  버니 메이도프가 오랜 시간 동안 사기를 유지할 수 있게 도운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바로 사람들이 그에 대해 '질문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질문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일방적인 의사소통만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질문하려는 주제, 즉 버니 메이도프가 불편하게 생각하는 주제에 대해 생각하는 것 자체를 멈추게 만들었다. 대신 수익이라는, 투자자에게 달콤한 주제에 대해서만 생각을 집중하도록 했다. 사실 투자의 과정은 어렵고 피곤한 일이다. 전문 투자자가 아닌 일반인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보통 사람들은 투자금의 수익률과 안정성만 보장이 된다면 투자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관심을 갖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관심을 갖는 이유는 아직 수익률과 안정성이 보장된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버니 메이도프는 본인의 명성, 직함으로 안정성을 보장했고, 만들어진 숫자로 수익률을 증명했으니, 일반 투자자들이 가장 귀찮아하는 부분에 대해 안심시켜 준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질문을 할 경우, 자신을 통해 투자할 수 없게 하겠다는 엄포를 놓을 수가 있었다. 버니 메이도프는 투자자들에게 안심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무관심을 유도했다.
 

질문의 이유는 알고 있지만

  어쩌면 질문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귀찮은 일일수도 있겠다. 잘 되고 있는 일을 멈춰서 하나하나 뜯어봐야 하는 노력과 질문받는 대상의 의도를 의심하는 것과 같은 오해를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나하나 뜯어봤을 때, 내가 그동안 듣던 것과 다른 내용을 발견할 수 있고, 질문받는 대상의 의도에 대한 의심이 맞을 수도 있다. 혹은 질문은 했음에도 모든 것이 질문하기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음이 밝혀질 때도 있다. 문제는 그럴 때면 우리는 쉽게 '에이 괜히 질문했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질문은 나뿐만 아니라 상대방 역시 귀찮게 만들고, 이는 미안한 일이라는 생각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통 이런 생각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질문을 안 하는데 유독 특이한 어떤 사람들만 질문을 하는 경우에 더욱 팽배해진다.  
 
  마음껏 질문하는 것에 용기가 필요한 상황, 사회는 슬프고 위험하다. 그것은 누군가가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전달하는데 제한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서로 다른 어떤 파트들이 자유롭게 소통하지 못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떤 주제에 대해 다양한 파트가 쉽게 참여하기 힘들다는 뜻이고, 의견이 누적돼서 긍정적으로 변화하기 힘든 분위기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로는 사회 속에서 나의 역할과 살아있음이 발현되기 힘든 분위기라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귀찮고, 누가 정해준 대로 살아가는 게 편하고 만족스럽다면 다른 얘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귀찮음을 유지함에도 이것이 나를 잘 살게 만들어준다면 누구라도 그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모두가 삶의 모든 과정에서 일일이 의미를 찾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며, 사실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누구를 비난해야 할까. 버니 메이도프와 공모자들은 당연히 비난받아야 한다. 제보가 있었음에도 무사안일주의에 빠졌던 행정기관도 비난받아 마땅하다. 암묵적으로 묵인한 은행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게 전부인가. 버니 메이도프에 투자한 투자자들은 어떻게 봐야 할까. 그들이 욕심을 가졌기 때문에 비난한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에 대한 욕심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하고 물을 것이다. 그들이 충분히 질문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당신이면 질문했겠냐고 되물을 것이다. 그것은 버니 메이도프 가면 안쪽을 왜 알아보지 못했냐는 물음과 같은 맥락이기도 하다. 그런데 작정하고 달려든 소시오패스를 일반인이 이길 수 있을까. 특히 그 소시오패스의 가면 뒤 본성과 돈에 대한 욕심이라는 내 가면 뒤의 본성이 정확히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을 때, 서로 잘 맞을 때 말이다. 그래도 만약 질문을 했다면 이 비극적인 유대를 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질문이 쉬운 사회의 분위기는 이 비극을 억제하는 안전장치를 몇 개 더 가진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정말 너라면 그 상황에서 질문할 수 있었겠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이 모든 생각 이후에도 여전히 나는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아마도 내가 당하지 않았던 것은 단지 시대를 비껴갔다는, 그저 운 때문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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