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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모스트 원티드 맨] : 균형을 잡는다는 것

by 리질리언스 2023. 1. 18.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왜 하는지 스스로 질문해 본 적이 있는가. 지금 하는 일의 궁극적이고 장기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하고 말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답이 있는 질문이지만, 많은 경우 답을 찾기 어려운 질문이다. 이 영화에서는 보다 안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라고 얘기한다. 어떤 것의 근본적인 이유와 목적을 묻는 것은 멋진 일이다. 문제의 본질로 다가갈수록 근본적인 해결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그와 밀접하게 관련된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질문에는 정답을 찾고 싶어 하는 진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질문을 던질 때면 나는 오롯이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 다른 주변의 개입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주체가 된다. 불필요한 선입견에서 자유롭거나, 생각하지 않아도 될 주변적인 것들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마치 철학적인 사고를 하는 것과 같다.

독립적인 주체들의 사회

진심으로 어떤 답을 찾고 싶어 하는, 독립적인 주체들이 모여있는 사회는 평화로울까. 이 영화에 나온 세 아들들은 아버지를 부정하거나 아버지의 결정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변호사는 처음의 의도를 수정하고, 은행가는 주인공 군터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며, CIA 요원도 주인공과 같이 안전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등장인물들 각각은 자신만의 생각이 있고,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 각자의 결정을 내린다. 그런데 이 결정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는 알 수 없기 때문에, 결정의 과정은 항상 두렵고 외롭다.

결국 주인공 군터는 당하고 말았다. 모든 것이 잘 맞아떨어지는 듯했지만, 예상대로 흘러가는 듯했지만, 그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주체에 의해 군터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것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과거에도 비슷한 경험을 당했고, 그때도 실컷 이용만 당했다. 같은 일이 반복된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 아닐까. 군터에게는 현재 상황을 읽어내고,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해 내는 능력이 탁월했지만, 무언가가 부족했기 때문에 그가 거의 이루어놓은 성과를 남에게 뺏긴 게 아닐까.

독립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이, 남들과 주변에 주도권을 뺏기지 않고 오롯이 혼자만의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어떤 때에는 오히려 자기 고립을 만들기도 한다. 주변을 향한 눈을 가리고, 귀를 덮게 한다. 통제할 수 있을 때, 이것은 순수한 내 생각을 도출할 수 있는 훌륭한 전략이자 도구가 되지만, 이 전략에 대해서 너무 의심 없이 다가갈 때에는 이 전략에 의해 내 태도가 고착된다. 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 주변의 의견에 대해서도 마음을 닫게 되고, 그것을 자신만의 생각을 위함이라고 말하게 된다. 그렇게 나는 과거의 내가 만들어놓은 질서에 갇혀서 새로움의 개입을 막는다.

나와 주변 사이에서의 균형

스스로 온전한 생각을 하는 것과 주변의 반응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은 어렵다. 전자에서는 오롯이 혼자가 되는 상황을 만들어야 하고 후자에서는 주변의 흐름이 나에게 들어오는 것을 막지 않아야 한다. 후자에만 너무 집중하면 사유의 시간을 갖기가 힘들고, 전자에만 집중하면 과거의 내가 만든 틀에 갇히게 된다. 오롯이 스스로 한 생각이라도,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낸 결론이라도, 새로운 정보의 수용 없이는 현재의 새로운 상황에 적용하기에 이미 지나버린 것이 된다.

만약 군터가 모르(독일 정부 내 다른 조직의 수장)에게 좀 더 부드러운 태도로 대했으면 어땠을까. 그러면서 그에게 어떤 정보를 얻어냈으면 어땠을까. 그렇게 그를 이용하는 쪽으로 전략을 잡았다면 어땠을까. 만약 그랬으면 군터의 계획이 지금만큼의 성과마저 이루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의 결론처럼, 그가 원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절연되지는 않았을 수 있다. 혹은 그의 계획을 실현했을 수도 있다. 모르의 도움을 받아서 말이다. 군터는 왜 그가 배신당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을까. 왜 주변이 그를 약속한 대로 기다려줄 거라 생각했을까. 왜 자신의 무례함이 상대의 무례함으로 되돌려 받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스스로의 생각과 주변에 대한 유연함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어쩌면 의외로 작은 태도의 변화에서 시작될 수도 있다. 겸손한 것 그리고 예의와 성의를 가지고 주변을 대하는 것. 사실 주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 우리는 그들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오히려 중요한 문제일 때가 많다. 그리고 이를 위해, 주변 사람들을 얼마나 단절할 것인가가 관건일 때가 많다. 하지만 중요한 건, 우리가 자유로움을 원할 때에도 '완전히 닫아버리지' 않는 것이다. 주변으로부터 나를 차단하지 않는 것. 주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차분히 보고, 주변의 의견을 한 발짝 떨어져서 들어보는 것. 너무 차갑게 주변을 내치지 않는 것. 그럴 수도 있다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 그래서 주변이 나에 대한 반감까지는 갖지 않게 하는 것. 계속 그렇게 떠들어댈 수 있도록 남겨두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변의 반감을 사지 않기 위해 너무 애쓸 필요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한 발짝’ 떨어져서 듣는 것이 중요하다. 어차피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은 남게 되게 되어 있으므로, 일부로 떠나게 내치지 않을 정도면 된다. 그러면 그렇게 남아 있게 된 주변의 떠들어댐을 나를 위한 좋은 자극으로 이용할 수 있다. 이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주변의 떠들어댐 속에서도 그 떠들어댐에 휘둘리지 않는 것. 하지만 이 떠들어댐이 없는 고요한 세상에는 과거의 내 의견과 내가 만들어낸 모습만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떠들어댐 속에 고요함이 필요하다. 군중 속에 고독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군중과 고독 사이의 연결 지점에 따뜻함과 겸손, 예의가 필요하다. 언제든 군중의 의견을 더 듣고 싶을 때 들을 수 있도록 말이다.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 필요한 것

결국 궁극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잊지 않는다면, 그것을 실현하는 방식은 어떤 것이든 될 수 있다. 그것은 온전히 내 방식일 수도 있고,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일 수도 있다. 어차피 우리가 이 세상에 혼자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세상을 어떻게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이다. 군터는 멋있는 사람이지만, 좋은 감각과 재능을 가졌고, 계획한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추진력과 그를 도와줄 팀을 가졌지만, 그 팀 밖의 세상에 대해서 너무 선을 그었다. 물론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기 위해서 어떤 선들은 필요하기도 하다. 어떤 경우에는 독단성 역시 훌륭한 도구가 된다. 하지만 그 독단성으로 과거에 실패를 경험했다면, 이번에는 유연성으로 그 실패가 만든 공백을 채웠어야 했다.

자신을 어떻게 지켜나가야 할지는 늘 어려운 문제이다. 나의 스타일을 상황에 맞춰 계속 수정해 나갈 때, 이것이 나를 잃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으로부터 자유롭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만약 지금 이 의심이 들고 있다면, 그리고 그것 때문에 두렵고 괴롭다면, 최소한 지금은 잘하고 있는 거라 생각한다. 그때 나는 과거의 나도 보고 있고, 앞으로 바뀌려는 나도 동시에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상반된 두 개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과 비슷하다. 이것이 쉽지 않은 이유는, 균형을 잡는다는 것이 한 번으로 끝나는 행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습관이나 태도 같은 것이 때문이다. 그렇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속성이다. 한 번에 결론 내려하지 않고, 과거의 잘함이나 못함에 그치지 않고, 계속 대화와 질문을 지속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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