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아무런 설명도 없이 잡혀와서 몇 년 동안을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억울함. 사람이 가장 느끼지 말아야 할 감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갇혀 지내는 불편함, 몸의 자유를 구속받는 것도 힘들겠지만 도대체 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됐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이 가장 답답할 것 같다. 누군가 갇혀있는 이유라도 얘기해 주고, 그것에 대해 비난을 한다면 차라리 나을 것 같다. 그러면 최소한 그에 대해 항변하고 반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이런 나의 설명이 오해를 살 때 억울함을 느낀다. 내가 설명을 잘 못하거나 상대방이 내 입장을 이해할 수 없을 때 억울함을 느낀다. 그렇지만 더 억울한 것은 상대방이 내가 하는 말을 들으려조차 하지 않을 때이다. 상대방이 내 입장을 궁금해하지 않을 때이다.
인권변호사
사람은 다 누구나 자기의 입장을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 얘기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혹은 그 기회를 거짓말로 스스로 날려버리든 말든 말이다.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어떻게 활용할지는 본인의 선택이지만, 그 기회조차 가질 수 없게 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최소한의 권리를 빼앗아 가는 일이다. 스스로를 보호하는 가장 처음이 타인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주인공인 인권변호사 낸시가 수감자 모하메두의 사건을 맡은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그 가장 기본적인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
911 테러
다수의 사람들이 극도의 공포와 분노에 차있으면,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창구가 필요하다. 특히 이 사람들을 관리하는 정부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정부는 국민들에게 그들이 사는 사회가 공정하다는 것을 증명해내지 못하면, 그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공정함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우리는 법에 의존한다. 공정함을 시행하는 과정에 누구라도 동의할 수 있게 말이다. 그런데 공정함과 그것을 획득하는 과정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각각 다르기 때문에, 대부분이 동의할 수 있는 최소한을 합의해 둔 것을 헌법이라고 묶어두고, 여기에는 개인과 사회의 존립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권리들을 정의해 두었다. 헌법은 인간의 권리에 대한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것들을 모아둔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나라에서 내용이 비슷하고, 이는 다시 그것이 얼마나 다수의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지켜져야 할 것들인지를 말해준다.
군인
어느 조직에나 정의로운 사람은 있다. 조직의 논리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기본적인 신념을 지키는 사람. 결론적인 정의를 위해 과정의 정의를 놓치지 않는 사람. 그리고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해 꼼꼼함을 유지하는 사람.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과정에서 예상되는 주변의 비난에 굴복하지 않는 용기를 가진 사람. 자신과 정반대의 입장에 있는 사람의 말도 귀 기울여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오히려 모두가 각자의 입장을 설명할 공정한 기회를 가졌을 때, 그 이후에 이루어진 자신의 설득이 더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은 어느 조직에나 있을 수 있다.
정의
정의를 추구하는 과정은 쉽게 이루어지기가 힘들다. 정의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다수의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다양한 설득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설득을 위해서는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사실 조사와 관계 파악이 필요하다. 문제는 사건의 당사자들조차 각각 다른 입장으로 인해, '일어난 일'에 대한 사실 관계를 밝힐 수는 있지만, 그 일의 의도에 대한 '진실'을 정의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사실 관계는 '밝히는 것'이지만, 진실은 '정의하는 것'이다. 사실은 있는 그대로를 단순히 파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은 객관적인 사건의 배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은 의도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의도는 주관적인 것이다. 한 가지 사실을 둘러싸고도, 그 사실에 대한 각자 다른 입장을 가진 당사자는 다른 의도를 갖는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 의도는 당사자가 일으킨 행위를 통해 밝혀진다. 행위의 당사자가 실제로 그 의도를 가졌는지, 가지지 않았는지, 가졌다면 언제부터 가졌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일어난 행위를 통해 가졌다고 해석되는 의도가 중요하다. 그게 남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의도이기 때문이다. 결국 나의 진실은, 내가 타인에게 어떤 의도를 가지고 행동했는지를 해석하는 과정, 그 해석을 결정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정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의를 추구하는 과정이 어려운 것은 각자의 입장, 각자의 진실을 해석하고 정의하는 검토 과정이 꽤나 힘들고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과정을 짧게 혹은 쉽게 하기 위해, 이를 대충 할 수는 없다. 이 검토 과정의 결과가 어떤 사람의 인생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이 시간을 너무 길게 가져서도 안 된다. 검토 과정의 시간, 즉 아무런 결정도 나있지 않은 시간에서 분쟁의 당사자가 피해를 당하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모하메두의 경우가 그랬다.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는 채 14년을 갇혀 있었다. 자신이 왜 갇혀있는지에 대한 '상대방이 주장하는 진실'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과정에 대한 설명조차 듣지 못했다.
진실을 찾기 위한 시간
어떤 분쟁이 일어났을 때, 누가 잘못했는지, 분쟁의 결과가 정의롭게 밝혀지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을 통해, 처벌과 보상이 이루어질 수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대개 재판에서 누가 이겼는지를 궁금해한다. 그들의 말이 결국 진실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제야 그들의 말이 진실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누구의 말도 진실이 아닌 시간을 갖게 된다. 이 시간 속에서는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가 훼손당하기 쉽다. 이 시간은 권리의 사각지대 같은 곳이다. 진실을 찾기 위해 설명하는 과정은 충분히 보호받아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가진 진실에 반대하는 상대가 국가일 때, 그리고 그 국가가 분노에 찬 국민의 지지를 얻고 있을 때, 그래서 내가 그 분노를 표출시킬 대상으로 지목받고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이미 답을 정해놓고 말하는 대상과 얼마나 진전 있는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상대방이 내 말을 들으려는 의지가 전혀 없을 때 말이다. 나의 설명이 납득이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어떤 말을 하든 이미 대화의 결과가 정해져 있을 때도 대화를 계속해야 하는 상황이 있다. 상대방의 아무리 듣고자 하는 의지가 없어도 나를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있다. 그것마저 하지 않으면, 그것을 포기하는 순간, 내가 상대방이 주장하는 내 잘못을 인정한 꼴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상대방은 내가 포기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는 것을 일부러 강하게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설명의 과정에 정의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지 못할 수도 있다.
주인공 모하메두는 수렁에 빠진 것이었다. 애초에 자신을 설명하는 과정의 정의를 찾을 수 없는 곳에서 그의 고난은 시작됐다. 분노에 찬 거대권력과 싸워야 했고, 그들은 애초에 귀를 닫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절망적이고 무력한 시간 속에서도 설명을 멈추지 않았다. 물론 그에게는 그의 설명을 들어줄 한 사람을 갖는 행운도 있었다. 하지만 그 한 사람마저도 처음에는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아무도 오랜 시간 동안 나의 말을 듣지 않을 때도, 그 설명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를 수렁에서 빼내어 준 것은 그에게 찾아온 행운보다는 설명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집념처럼 보인다. 감옥에서 할 일이 그것밖에 없지 않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내 얘기를 도무지 듣지 않으려 하는 상대에게 14년 동안 설명을 지속할 수 있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처럼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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