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마음속에 상처가 한 번 자리 잡으면 좀처럼 그것을 꺼내기가 힘들다. 혹은 꼭 '트라우마'까진 아니더라도 어떤 생각이나 집착 때문에 다른 것들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가 있다.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은 이유는 그것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생각에 불필요한 다른 생각들이 끼어들 때, 그로 인해 판단이 명료하지 않을 때, 그 생각의 주체가 나인지 의심이 든다. 물론 상처받은 또 다른 자아, 그 때문에 지속적으로 내 머릿속에 출현하여 나를 괴롭히는 자아 역시 나의 일부이지만, 그런 출현이 통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때 이제는 그것이 반갑지가 않다.
어쩌면 자유는 통제에 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을 흔히 자유라고 말한다면, '내 마음대로'가 통제를 의미한다. 그리고 나와 내 주변에 대해 얼마큼 통제할 수 있는가가 나의 자유도를 대변한다. 일단 나보다 내 주변을 통제하는 것이 더 어렵다. 권력은 내 주변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뜻하고, 이는 궁극적으로 타인의 자유를 통제할 수 있는 경우를 뜻할 때가 많다. 다만 그 통제 방식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에 따라 권력의 통제를 받는 당사자가 본인의 자유를 억압받았다고 느끼기도 혹은 아니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나를 통제하는 것 역시 쉽지가 않다. 단지 내 몸이라고 해서 내 생각, 내 습관들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가끔씩 생각도, 습관도 각각의 자유로운 의지가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면서 내 안에 여러 종류의 내가 서로 충돌하는 것을 느낀다. 한 가지 문제에 대해서 지금의 생각하고 있는 나와 본능적으로 흐르는 나,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내가 서로 다르게 반응할 때가 있다. 어떤 자기 계발서에서는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보통 이 의지는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나로부터 출발한다. 어떤 명상법에서는 과거의 생각들을 버리고 현재의 상태에서 호흡을 느끼는 것을 강조한다. 어떤 내가 중요한지, 나의 어떤 상태가 '맞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과 답이 반복되는 이유는 내 안의 수많은 내가 충돌하는 경험이 지극히 모두에게 반복되는 일이며,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내 안의 자유가 침해당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스터와 추종자
마스터는 인간이 스스로에게 자유를 부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연구한다. 그리고 주인공 프레디는 그에게 매력적인 연구 대상이 된다. 프레디는 과거 전쟁의 기억으로 인해 현재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스스로에 대한 자유가 잠식당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마스터는 프레디의 마음속에 자유를 주기 위해, 나와 내 주변 상황은 나의 의지로 변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강조하고 훈련한다. 프레디는 그 훈련을 따르고 어느 정도 효과를 보았다.
사실 마스터가 프레디를 훈련시키는 방식은 그에게 자유를 주는 것과 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 사이에 있다. 프레디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과 프레디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교묘하게 섞여있다. 마스터로 인해 마음의 안정을 얻은 프레디는 마스터에게 점점 의존하게 되고, 그를 신봉하게 되고, 나중에는 그의 노예처럼 변하게 된다. 마스터와 함께 감옥에 갇혀 격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프레디 자신에 대한 것인지, 마스터에 대한 것인지 분명치 않다. 다만 내면의 자유를 위해 의존했던 마스터에 집착할수록 프레디의 행동은 점점 그의 애완견처럼 변해가는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마스터 역시 시간이 갈수록 프레디에게 의존한다. 마스터의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은 그의 연구, 그의 이론이고,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연구대상이 프레디이기 때문이다. 프레디를 좋아하는 유일한 사람이 자신이라고 프레디에게 쏟아 붙이는 말에는 프레디를 위협하여 자신의 통제 하에 두려는 목적도 있었겠지만, 그 역시 프레디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토의 의미도 있었다. 그는 프레디를 통해서만 삶의 목적인 자신의 과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언제 떠날지 모르는 프레디를 곁에 두고 있는 마스터 역시 조금은 불안해 보인다. 그리고 결국 프레디는 떠났다.
완전한 독립
마스터가 프레디에게 한 말처럼, 어떤 마스터도 섬기지 않고 사는 방법이란 게 있을까. 만약 그런 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완전한 독립일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수많은 마스터-추종자의 관계를 만들어낸다. 선생님, 직장상사, 멘토, 절대자. 삶의 작은 부분에서도 나는 마스터를 가지고 있고, 내가 어떤 사람의 마스터가 되기도 한다. 마스터를 만드는 처음의 이유는 나의 작은 자유를 위해서였다. 어떤 것을 배우거나 평가받는 과정에서, 혹은 마음의 위안을 얻는 과정에서, 우리는 약간의 자유를 얻는다. 내가 인정하고, 믿고 의지하는 틀이 정해지면 그로 인해 생각의 범위가 제한되는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 '여기에서만 생각하면 되는' 그 안에서의 자유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어디까지나 정해진 틀 안에서의 자유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궁극적인 자유가 아님은 자명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전에 내가 따르기로 정한 틀보다 나의 몸집이 커질수록, 이제는 그 틀을 지켜야 하는 내가 자유롭지 않다. 혹은 반대로 그 틀에 집착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 집착은 내가 가진 틀 밖으로 조금이라도 나가는 것에 두려움을 준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완전한 독립을 꿈꾸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다.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이 책임지는 것보다 마스터를 추종하는 것이 더 안정감이 있고, 덜 피로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무엇이 좋다 나쁘다의 문제라기보다 어떤 삶을 살지 선택의 문제일 것이다. 궁극적인 독립을 추구할 것인가, 정해진 틀 안에서 만족하며 살 것인가. 그런데 만약 궁극적인 독립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믿었던 나의 마스터들이 과연 여전히 나에게 맞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길 때가 있을 것이다. 그들이 만들어놓은 틀이 더 이상 나에게 맞지 않음이 느껴질 때가 있을 것이다. 혹은 내가 이제 내 마스터의 생각의 초과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느껴지는 영광스러운 혹은 두려운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떠날 때가 온 것이다. 프레디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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