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운 누더기
그토록 원하는 게 무엇이었을까. 어떤 원함을 위해 지금 그녀가 가진 짐이 그렇게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을까. 그 시절에 ‘집에 있는 여자로 만드는 병’은 다른 어떤 것과도 함께 할 수 없는 것이었나 보다. 그래서 그렇게 모든 힘을 다 해서 피하고 싶었나 보다. 비록 ‘성스러운 누더기’가 되더라도 말이다.
어떤 것에 열정을 가질수록 한 가지 생각에 갇히기 쉽다. 좋을 때는 한 없이 좋아 보이고, 한 번 눈 밖에 나면 더 이상 다시 눈에 들일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을 빠져 살다가 그 열정이 식을 때쯤 다시 객관적인 눈을 갖게 되었을 때, 예전에 내가 생각했던 가치보다 지금의 것이 다름을 느낀다. 여기서 그 차이가 컸을 때는 이후 내가 감당해야 할 것들이 많아진다. 내가 그때 왜 그랬지 하고 후회할 일들이 생긴다. 하지만 한 번 '눈이 돌아가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혹은 다른 사람의 만류가 있더라도 결코 쉽게 그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 ‘눈이 돌아가는’ 상황은 경험이 적을수록 발생하기 쉽다. 사실 좀 어렸을 땐, 좀 그래도 된다. 지금 보는 내 관점이 절대적인 것처럼 느껴지기가 쉽다. 다만 나중을 생각해서 ‘돌아간 눈’과 결국 제자리에 돌아올 눈의 차이가 적기를 바랄 뿐이다.
물론 1960년 대에, 원치 않은 임신이 여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 지에 대한 관점은 다른 문제일 수 있다. 단순히 어떤 열정에 사로잡히거나 치기 어린 ‘눈 돌아감’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생각보다 사회적인 결정들에 매우 깊게 종속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있는 미혼모를 바라보는 시선, 내 삶과 분리되지 않는 아이의 삶, 양육과 생계에 대한 고민들은 단순히 나만 깊게 생각해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그 끝은 대부분 엄마에 대한 비난이 남는다. 사회의 입장에서는, 혹은 타인의 입장에서는 아이에 대해 엄마 말고는 딱히 비난할 데가 없기 때문이다.
자유를 위한 갈망
그렇기 때문에 사실 주인공 안이 선택했던 것은 도망이 아니었다. 집에 있는 여자가 되는 것으로부터 도망이 아니라 자유를 위한 갈망이었다. 본인이 선택하지 않는 종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짐을 원하는 안에게 그것은, 꼭 그다음 원하는 무엇이 명확하게 있어야만 하는 게 아니었다. 안이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꼭 글을 쓴다는 목적이 있어야 할 건 아니었다. 그리고 꼭 대단한 목적이 있어야 할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대단한 목적과 이유가 없더라도, 가치 있게 사용할 만한 역량을 갖추지 않았더라도, 혹은 심지어 아주 쓸모없게 사용할지라도 자유를 가질 권한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어떤 시절, 어떤 경우에는 이 자유가 다른 가치에 의해 훼손당한다. 안의 시대에도 그랬다. 이 훼손이 사회적인 규칙의 형태로 다가올 때, 혹은 내 주변 다수가 그렇다고 주장할 때, 내가 생각해 왔던 자유의 가치를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참고 사는 게 맞나 보다, 이건 내가 누릴 것이 아닌가 보다 하고 자연스럽게 포기하게 되기가 쉽다. 어떤 때는 이를 양보나 희생이라 부르고, 어떤 때는 타협이나 절충이라고 부른다. 어떤 것으로 불리든 그만큼 내가 가진 자유가 어느 정도 사라짐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렇게 설득했던 사회와 주변은 그래도 괜찮다고 말한다. 그게 맞다고, 이제 어른이 됐다고, 이제 우리와 더 잘 어울릴 수 있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나와 내 주변은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
명예를 지킨다는 것
내가 어딘가에 잘 어울린다는 것은 내가 이미 어떻게 되도록 결정된 하나의 조각이 되는 것일 수도 있다. 다른 조각에 딱 맞춰 들어가도록 이미 형태가 만들어져 있는 조각 말이다. 어떤 상황이든 나만의 생각과 입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통제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는 사람에게는 가장 다루기 힘든 존재일 것이다. 이런 존재가 많은 곳에서는 효율이 떨어진다. 집중력은 모두가 한 방향으로 움직일 때 발생한다. 그리고 규칙은 여기서 만들어진다. 규칙을 따르다 보면 집중력과 효율성이 생기고,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자리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이 자리는 편안함을 제공하고, 그것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양보, 희생, 타협, 절충이 나름 괜찮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어떤 편안함도, 우리가 가만히 앉아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가지게 될 때, 뭔가 잘못되고 있음이 느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뭔가 이것 말고 다른 게 있을 것 같은 의문을 갖게 만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행복이 어떤 건지,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고민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리고 만약 이 고민과 생각에 잠기게 되면, 어떤 때는 내가 내 주변의 규칙과 함께 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비록 규칙을 배반 혹은 그것과의 싸움에 대한 정당성을 충분히 증명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역시나 내 자유가 비록 가치 있게 쓰이지 않더라도 나는 일단 자유를 가져볼 권리가 있으니까 말이다.
꼭 어떤 대단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살고 싶지만, 그렇게 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자유로운 삶은 살 수 있다. 어떤 것이든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스스로 결정해 보는 삶을 살 수는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그것을 제약하는 주변의 것들을 부정하고, 그것에 싸울 권리가 있다. 내 삶의 명예라는 것은 대단한 삶으로 만들어 놓은 결과가 아니라, 이렇게 스스로에게 자유를 부여하기 위해 싸우는 시도일 수 있다. 혹은 명예는 그 시도를 하는 용기에 부여되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이 명예를 지킬 수 있다면 최소한 나는 내 삶을 사는 것이라 자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외 나머지 것들은 충분히 ‘내어줄 수’ 있다. 그토록 평화와 안정을 원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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