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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도그빌] : 개들이 사는 마을

by 리질리언스 2023. 1. 15.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2003년 작. 작고 단순한 이야기 구조이지만, 연극적인 환경 연출, 인물들의 예민한 관계 설정, 그리고 적확한 어휘 사용을 통한 상황과 관계에 대한 비꼼이 돋보이는 영화이다. 다 보기 전에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제목이 이미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감독은 처음부터 많은 것에 대해서 꽤 직접적으로 얘기하고 있었다. 아래는 영화 이후에도 쉽게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단어들이다.

도그빌, 그레이스, 실례, 오만함, 본능, 약함, 권력, 심판, 책임

 

‘실례’, 연극무대 그리고 권력관계의 형성

‘실례(illustration)’라는 단어는 영화의 초반부터 등장한다. 누가 일상적인 대화에서 저런 단어를 쓸까. 하지만 모든 이야기가 끝날 때쯤 이 모든 것들은 주인공 그레이스를 위한, 혹은 그레이스가 시도한 일종의 '체험 학습'이었음을 느끼게 된다. 도그빌은 그레이스의 대중에 대한 관찰을 통해, 권력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립하기 위한 작은 실험 장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재밌는 것은 이 실험에 그레이스가 직접 실험쥐가 되어 ‘함께’ 실험 결과를 지켜봤다는 것이다. 그녀 자신이 그녀가 내린 결론의 ‘실례’가 되었다.


연극무대 같은 환경환경 구성은 이를 아주 효과적으로 보여 준다. 건물의 벽은 바닥에 선으로 표현되어 있고, 무대에는 각 건물의 분위기를 대표하는 오브제 요소만 실제로 서있다. 무대의 대부분으로 시선이 트여 있어서 관객은 모든 것을 관통해서 볼 수 있지만, 실제로 벽이나 문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배우들의 마임 연기를 통해, 관객은 일부 어떤 것들은 상상으로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감독은 관객으로 하여금 실제로는 모든 것이 보이지만, 그중 어떤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설정을 만들었는데, 이는 등장인물들의 입장이나 그 관계들의 속성과 유사하다.


실제로는 보이지만 못 본척하는 사람들. 대중에 대한 아주 현실적인 묘사이다. 이는 우리 주변의 권력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기도 하다. 강자와 약자의 관계는 어디에나 있다. 처음에 그 관계가 설정될 때, 당자사들은 자신이 상대에 비해 얼마나 강자인지 약자인지 알지 못한다. 경험이 없었기 때문인데, 이때에는 감성적인 반응으로 시작한다. 강자는 약자에게 연민을 느끼고, 약자 위에 군림하는 것을 불편해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강약의 관계 설정에 익숙해지면 그때부터 강자는 약자에 대한 우월감, 권력을 느끼게 되고, 이를 최대한 이용해서 이득을 취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이전에 보였던 것들이 안 보이기 시작한다. 혹은 보고도 못 본 척을 하게 된다. 예전 같았으면 눈에 띄었을 약자의 아픔이 자신의 이익 앞에서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좀 더 나아가면 권력관계의 민낯을 보여 준다. 이는 욕심이 생겼을 때, 얼마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느냐에 관한 것이다.

 

본능, 그레이스, 약함

권력을 경험해보지 않고, 그것을 학습해보지 않은 대중들에게 권력의 달콤함은 통제하기 어려운 것이다. 약자에 대해 강자로서 느끼는 쾌감, 약자를 지배하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느끼는 착각은 본능적인 것이다. 사회적인 관계는 계약에 의해 만들어지기 마련인데, 이 본능은 그 계약의 의미를 잊게 만들기에 충분히 강력하다. 약자를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그 약점을 찾다가 결국 지켜줘야 할 최소한의 가치, 인간성까지 저버리게 만든다. 학습되지 않은 강자, 통제되지 않은 강자는 그들이 어디까지 해도 되는지에 대한 이해가 없다.


그레이스는 이 마을의 다른 등장인물들과는 시작부터 달랐다. 처음에 그녀는 도망자 신분이었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약자처럼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그 약함은 일종의 체험이고 ‘학습 과정’이었다. 그런 점에서 도그빌이라는 마을에 그녀가 쫓겨서 온 것인지, 자신의 발로 스스로 걸어 들어온 것인지 의문이 든다. 도그빌에 어떻게 오게 됐든, 그녀의 미모는 한눈에 남들과 구분될 만큼 달랐다. 그녀는 고고했다. 누추하게 입었을 때도 기품이 있었다. 영화 초반부터 느껴졌던 그녀와 다른 인물들 사이의 위화감은 감독의 의도처럼 보인다.


마을에 온 그레이스는 배움이 없이 강자가 된 대중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약자이다. 그녀가 가진 고고함을 처음 접하는 원래의 약자들,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 자신들이 그 고고함을 지배해야 하는지, 지배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갖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 지배해도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리고 종국에는 이를 짓밟아도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재밌는 건 그레이스가 오히려 이런 마을 사람들의 행동을 약함이라고 해석한다는 것이다. 대중들이 이렇게 되는 것은 지극히 본능적인 것이고, 그들은 이 본능을 통제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약하기 때문에 감싸줘야 한다고 말한다.

 

오만함, 권력, 심판, 책임

그레이스는 마을 사람들의 만행을 모두 받아주지만, 여전히 그녀는 그들을 가엾게 여긴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때에도 여전히 그녀는 약자의 신분이라는 점이다. 이 부분에서 이상한 불편함이 느껴지는데, 어떤 약자도 자신이 진정한 약자라고 느낄 때, 도저히 개선의 희망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약자임을 자각할 때, 이렇게 여유 있게 반응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을사람들이 갱단을 부르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여유는 결국 마을 사람들이 갱단을 부르게 될 거라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게 한다.


사실 그레이스는 약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한 번도 진정한 약자였던 적이 없었다. 원하기만 했다면 그녀는 언제나 스스로 갱단을 부를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갱단이 가지고 있는 권력을 한 번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다만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혼자서만 주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은 약자를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함으로써 그들을 교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그빌이란 마을에서 겉으로 보기에 그녀가 처한 관계는, 그녀가 약자이고, 마을 사람들이 강자였음에도, 그녀는 마음속에서 마을 사람들을 약자로 생각했다. 본능을 통제하지 못하는 약자로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녀는 자신을 그들과 엄격히 구분한 셈이다. 사실 그녀의 마음속에서 그녀는 이미 그들보다 우월한 존재였다. 그리고 교화를 통해 그들에게 ‘시혜’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오만함이란 여기에 있다. 애초에 그레이스와 마을 사람들의 관계는 공평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처음에는 그레이스가 약자 같았지만, 결국에 그녀는 강자였고, 권력이었다.


나와 상대방의 관계에서, 누가 강자이고 누가 약자인지 서로 알고 있을 경우에는, 각자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명확하다. 그 때문에, 이 경우 관계설정과 행동양식의 결정에는 어려울 것이 없다. 하지만 만약 자신이 강자인 줄 알았는데, 사실 약자라고 여겼던 상대방이 강자였을 때는 다른 얘기가 된다.


인간은 모두 본능에 약할 수밖에 없다. 모든 본능을 다 인정해 줄 수는 없지만, 약자로서 강자 앞에 최대한 잘 보이려 하거나, 자신이 약자임을 인식해서 그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시도를 하도록 마음먹을 기회는 갖게 해줘야 한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본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자신의 학습을 위해, 이 기회를 빼앗았다. 그녀는 일부 진실을 숨겼다. 이렇게 되면 그레이스가 결국 도그빌에서의 '학습 과정' 중에 본 것은, 대중이 본능에 취했을 때 어떻게 망가져가는지에 불과하게 된다. 그런데 아마도 그녀는 자신의 심판에 대한 정당성을 여기에서 찾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심판이 자신이 가진 권력에 대한 책임이라고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모두가 모든 정보를 공평하게 가지고 있었어도 그런 결과가 나왔을까. 그레이스가 약자가 아님을 알았다면 마을 사람들은 다르게 행동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레이스가 ‘순수한’ 실험 조건을 만들기 위해 자신이 아는 것들을 마을 사람들에게 숨긴 것이 정당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 질문은 그레이스의 행동을 더욱 정당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게 한다. 애초에 이런 실험을 감행할 수 있는 자격은 누가 부여할 수 있는 것인가.

 

도그빌의 그레이스

아마도 감독의 입장이 그레이스가 옳다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의 심판에서 느껴지는 이 불편함이 같이 느껴지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들은 당해도 싸. 죽어도 싸’ 뒤에 느껴지는 것이 단순한 복수의 희열이 아니라 왠지 모를 불편함이라는 것이, 감독이 우리와 함께 공유하고 싶었던 점일 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도그빌에 온 ‘그레이스’가 마을 사람들에게 ‘축복’이라고 느꼈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녀는 그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다 말할 수 있지만, 그들은 이제 모두 죽고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같은 조건에서 도그빌 말고 다른 마을의 사람들이었다면, 과연 그들은 얼마나 다르게 행동했을까.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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