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시간은 영원히 잊고 싶지 않다. 잊지 않으려 사진을 찍어보고, 기록해 보고, 안간힘을 쓰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은 점점 희미해진다. '기억이란 마지막 기억을 기억하는 것'이라는 영화 속 대사에 공감하게 된다. 그렇게 우리가 기억하는 시간은 점점 축약되거나 사라지거나, 어떤 것은 서로 중첩되기도 한다. 차라리 그렇게 기억하는 게 우리 마음이 편할 때가 있다. 토니와 토니 2의 기억이 서로 겹쳐지듯이 말이다.
기억에 대한 상반된 두 가지 태도
누군가, 지금 우리에게도 영화에서 나온 것과 같은 홀로그램 기술이 있다면 사용을 하겠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했다. 너무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기억의 보존을 위해서 기억을 파헤치는 과정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지 만은 않았다. 오히려 어떤 기억은 차츰 퇴색되어 사라지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리고 어떤 것은 중첩되고 왜곡되는 게 더 나을 텐데, 기억의 '정확한' 보존이 이런 것을 억지로 막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사실 영화 속에서도 어떤 기억은 이미 왜곡되어 있다. 우리는 대개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려고 한다. 이것은 어떤 강한 의지를 가지고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그것이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에서 이 과정은 자연스럽고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일인데, 문제는 홀로그램의 기억장치의 경우, 한 번 입력을 해놓으면 이제 그것은 더 이상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카사블랑카 영화를 보는 기억으로의 업데이트가 월터 프라임에게는 일종의 조작이었고, 마조리에게 그런 월터 프라임은 너무 심각한 것처럼 보였다. 역시나 인간에게 기억의 조작은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사실이 아닌 기억
마지막 기억을 기억하는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기억은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어쩌면 취향과 의지를 반영한 조작의 흔적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흔적은 다른 모든 것처럼, 시간을 지남에 따라 마치 생명체처럼 변하게 된다. 어떤 것은 자라기도 하고, 어떤 것은 사라지기도 한다. 새로운 조작을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프라임의 기술에 이런 기억의 변화까지 반영이 되어 있진 않은 듯하다. 프라임에는 축적만이 있을 뿐이다. 조작을 위해 어떤 것을 말하면, ‘앞으로는 그것 역시 기억하려고’ 할 줄 밖에 모른다.
프라임처럼 스스로는 변화할 수 없는 것에 의지하는 이유는,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방법 말이다. 하지만 프라임의 사용자들은 이렇게 프라임에 의지하는 것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인지 아내의 홀로그램에 자신의 기억을 입력하는 주인공 존의 모습이 그리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그가 간직하고 싶은 기억을 미래에 리플레이하기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아내와 함께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며 과거를 이야기할 때와는 분위기가 너무도 달랐다. 프라임에 기억을 '입력'하는 것은 앵무새에게 말을 가르치는 것과 같았다. 대상과 어떤 공감도 연결도 없는 단순한 입력 말이다. 그런데 존이 간직하고 싶었던 것은 단순히 기억하고 싶은 사람에 대한 에피소드였을까. 당장의 그리움이 그런 것들이라도 간직하고 싶게 만들었지만, 프라임의 사용자들은 결국 프라임에 저장된 기억이 살아있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그 기억이 인간의 기억처럼 자연스럽게 변화되거나 조작되지 않음을 느끼면서 말이다. 그래서인지 프라임을 사용하는 모두는 결국 슬퍼 보인다.
소멸되는 것의 아름다움
우리는 과거에 찍어놓은 사진 한 장을 보더라도 십 년 전에 그것을 볼 때와 다르게 느낀다. 그렇게 기억은 나의 삶이 자라면서 함께 변화한다. 그런데 프라임에 저장된 기억은 변화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의 모습으로 그것을 재생해 준다. 이것은 마치 조금 리얼한 사진을 보는 것과 같다. 프라임이 사용자의 반응에 따라 기록을 업데이트하는 것은, 약간의 학습기능이 있는, 조금 세련된 녹음기와 다를 바가 없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사람의 가장 기억하고 싶은 모습을 기록하는 정도면 된다. 아마도 홀로그램 프라임은 프라임 타임을 의미할 것이다. 그때의 시간으로 기억을 멈춰 놓는 장치 말이다.
그런데 사실 기억은 '멈춰있는 사진'같은 것이 아니라 그 사진을 보며 떠올리는 해석행위이다. 이 해석행위를 위해 사진은 단지 매개체로 쓰일 뿐이다. 하지만 프라임이 단순히 사진과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보여주는 사람의 형태로 인해 사용자가 자꾸 그것에 의존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매개체라는 것을 잊게 된다. 그래서 엄마가 자신보다 홀로그램에게 '의지'하는 것을 질투하는 딸의 반응은 자연스럽다. 홀로그램을 보고 있으면 과거의 기억들이, 그 모습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살아있지 않음을 알면서도 눈에 보이는 형태와 귀에 들리는 목소리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그런데 살아있지 않은 것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일까.
영화의 등장인물 중, 월터와 마조리, 아내까지 가장 많은 프라임에 기억 입력을 직접 했던 존이 가장 가엾다. 자신의 기억을 자신으로부터 분리하고, 저장하고, 확인하고, 기대하고, 실망하는 과정들을 반복하면서, 더 이상 그들의 없음에 대한 상실감이 더 커졌을 것 같다. 모든 기억이 그렇듯 상실감 역시 서서히 사라져야 하는데, 억지로 그렇지 못하게 하는 과정을 많이도 겪었다. 그래서 결국 존은 언젠가 아내의 프라임 사용을 중단했을 것 같다. 잊혀야 하는 것은 잊혀야 하므로. 기억이란 마지막 기억을 기억하는 것이라 한다면, 점점 희미해지는 것도 기억의 역할이니 말이다. 그래서 다시 누가 묻는다면, 나는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한 이후에도 프라임을 사용하지 않을 것 같다. 그게 그 사람을 더 그 사람답게 기억하는 방법이고, 그럴 때 그 사람과 나의 기억이 살아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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